I. 서 론
인터넷, SNS의 등장은 우리 사회 전반에 기존의 수직적 구조나 관계를 수평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서 민주적 전환(demotic turn)을 일으키고 있다(Turner, 2010: 7). 민주적 전환은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특정 주체의 독점권을 해소함으로써 어떤 권위나 지위를 지닌 전문가 개념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을 잠재적인 전문가로서 인식하도록 이끈다. 이는 교육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가령 이제 우리는 ‘나는 구글이 있는데, 왜 선생님이 필요한가요?’라는 학생의 질문을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Morgan, 2014: 1).
우리는 오랜 기간 교사가 하는 일을 가르치는 일로 학생이 하는 일을 교사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일로 인식해오면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교사가 가르치는 것을 학생이 배우는 수직적 관계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이제 학생이 교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며 교사와 학생 사이의 기존 관계를 재고해 보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민주적 전환이 민주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게 하는 용어라면, 이제 우리는 좀 더 민주적인 관점에서 교사의 역할과 전문성을 고민해 보아야 할 때이다.
단적으로 오랜 기간 교사의 전문성을 대변해 오던 주어진 교육과정을 잘 가르치는 일은 앞으로 점차 가벼워질 것이며, 이러한 역할만을 지속하는 한 교사는 교사로서의 존재감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학생이 지식과 정보를 접하고 학습하는 경로가 다양해짐에 따라 학생이 배워야 할 것을 국가가 제공하고 교사가 가르치면 학생이 배우는 일련의 선형적인 절차와 역할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교사와 학생이 직접 교육활동과 관련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교육과정 개발에까지 개입하고 있다(유성열, 정광순, 2021: 93). 그 결과 학교에서 가르칠 내용을 선정하는 일을 더는 학교 밖에서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교사가 거주하는 교육과정 공간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학교 교육에 대한 여러 요구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다양한 목소리에도 반응해야 하는 역동적이고도 복합적인 공간이다(Aoki, 1991: 161). 그리고 교사는 양쪽 모두를 고려하여 독자적인 교육과정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때 교사의 역할은 수업하기를 넘어 수업 만들기로 확장되며, 수업하기와 수업 만들기를 오가는 교사들은 기존의 수업 전문성과는 다른 교육과정 전문성을 발휘한다.
오늘날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모습을 다루는 연구물들을 보면, 교사가 국가교육과정을 사용하며 저마다의 맥락에 맞는 교육과정을 만들어 가르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김동현, 2021; 서명석, 2011). 이때 교사가 실행하는 교육과정은 교실에서 개발한다는 점에서 교실교육과정(김두정, 2006; 이윤서, 2020), 교사가 개발 주체라는 점에서 교사교육과정(이윤미, 2020; 이동성, 2021; 전라북도교육청, 2021)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오늘날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장에는 국가교육과정뿐만 아니라 로컬에서 개발하는 다양한 교육과정들이 공존한다.
민주적 전환의 관점에서 보면, 오랜 기간 교육과정 관련 권한을 중앙에서 독점해 온 곳에서는 그 권한을 시·도 교육청, 학교 등으로 분권화하는 방향을 취하고(Alvunger, 2018; Skilbeck, 1976), 학교가 독점해 온 곳에서는 시·도 교육청, 연방 정부 등과 나누는 방향을 취하였다(Kelchtermans, 2009; Morgan, 2014). 전자가 하나로 존재하던 교육과정을 다양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교육과정들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방향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교육과정에 좀 더 민주적인 관점을 취하기 시작했다.
교사는 이 모든 교육과정을 사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Connelly, 1972; Deng & Luke, 2008). 교사가 일련의 교육과정을 사용하고, 개발할 수 있는 전문성과 관련한 관심이 높아지고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밀접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를 매개로 하여 교육과정을 연구하는 주제나 논의들은 여전히 한정적인 편이다. 즉 로컬에서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모습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비해 교육과정과 관련한 교사 개념이나 우리나라만의 교육과정 생태계를 드러내 주는 논의들은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정광순, 2020: 48).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여전히 한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교육과정 관련 교사 역할이나 전문성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확장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관련 교사 행위와 개념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와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과정과 관련한 교사의 행위는 교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교사의 역할은 교사에게 요구되는 전문성을 가늠하는 유용한 잣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Mitchell, 2017: 101). 그리고 이러한 행위, 역할, 전문성이 모여 특정한 시대, 상황, 맥락에 부합하는 교사 개념을 형성한다는 점(Clandinin, Connelly, 1992: 390)에서 교사의 행위, 역할, 전문성, 개념은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을 살펴볼 수 있는 유용한 단서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연구는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이 이제 막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이를 이미 거친 서구의 사례를 중심으로 교사와 교육과정 관련 담론을 먼저 검토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발아되고 있는 교사와 교육과정 관련 논의들을 크게 정책적 차원과 실천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본 뒤, 이러한 고찰 결과에 기초하여 국내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 형성 및 발전에 줄 수 있는 함의를 제시하였다.
II.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 검토
최근 교사를 교육과정 개발의 핵심 주체이자 변화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도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에 주목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노진아, 2020; 유성열, 정광순, 2021). 이 장에서는 앞서 이러한 과정을 거친 서구의 사례를 중심으로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을 검토하였다. 다만 이러한 담론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교육적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비판적인 수용은 경계해야 한다.
교육과정 역사 연구는 1900년대 중반까지의 교육과정 분야를 교육과정 대중화, 공립화, 제도화 시기로 설명한다(Shubert et al, 2002). 이 시기에는 늘어나는 학교 교육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고 학교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위해 학교 밖에서 교육과정을 연구, 개발하여 학교로 보급하는 RDD (Research, Development and Diffusion) 방식의 교육과정 개발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양적으로 폭증하던 학교 교육에 대한 요구와 기대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지만 학교 교육을 정치, 경제, 사회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여기고 교사와 학생을 배움의 객체로 간주하며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CERI, 1979; Skilbeck, 1976).
이후 학교 밖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교육과정을 개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등장하며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장이 학교 밖에서 안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는 교육과정에 대한 교사의 직접적인 연구와 개발을 가능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SBCD(school-based curriculum development) 운동은 RDD 방식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형성한 대표적인 담론이다(CERI, 1979; Skilbeck, 1976).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Skilbeck(1976)은 SBCD를 오래된 생각에 대한 새로운 이름이라 규정하고, 교육과정은 본래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곳에서 그들이 직접 개발하는 것이라고 피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교육과정 개발 주체와 장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SBCD 운동은 그간 ‘창조’의 의미로 한정적으로 다루어지던 교육과정 개발의 의미를 ‘재구성’이나 ‘선택’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하였다(유성열, 정광순, 2021: 40).
이는 첫째, 교육과정에 대한 의사결정 권한을 중앙에서 로컬로 돌려주는 방향으로의 전환, 둘째, 학교 밖에서 개발한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 개발한 것도 교육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전환, 셋째, 학교 밖 외부 전문가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도 교육과정 개발자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모종의 민주적 전환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SBCD는 학교 안에서 개발하는 교육과정이 학교 밖에서 개발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일방적인 가정이 아닌 교육과정은 본디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장소에서 개발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존중하며, 교사만이 교육과정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 교사도 교육과정 개발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SBCD가 유럽을 중심으로 발아한 교육과정 개발 담론이라면, 교육과정 실행 연구는 북미를 중심으로 확산한 교육과정 연구 분야이다. 결과적으로 두 분야 모두 RDD 방식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오랜 기간 학교 혁신을 위해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실제로 학교는 의도한 만큼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교사는 교육과정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Cuban, 1992; Snyder et al, 1992). 즉 학교 밖에서 훌륭한 교육과정을 연구, 개발하여 보급하기만 하면 학교는 변화할 것이라는 전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Snyder, Bolin, Zumwat(1992)는 그동안의 교육과정 실행 연구들을 종합, 검토하여 학교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대표적인 관점을 충실도, 상호조정, 생성 관점으로 구분하였다. 우선, 충실도 관점은 초창기 실행 연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관점으로 주로 학교 혁신의 성공 여부를 교사가 외부에서 주어진 교육과정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행하였는지에 따라 판단하였다. 다음으로 상호조정 관점은 변화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관점을 갖고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교육과정과 교사 그리고 학생이 서로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에 주목하였다. 즉 이 관점에서는 학교 밖에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사람과 학교 안에서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사람을 동등한 관계로 간주하고 학교의 변화는 학교 안팎이 서로 조율하며 일어난다고 보았다(McLaughlin, 1976: 340). 끝으로, 생성 관점에서는 교육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바라보고, 학교의 변화는 교사와 학생이 교육적 경험을 생성하며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교육과정 실행 연구들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모습을 서로 다른 세 방식으로 접근하며, 학교 밖에서 개발하여 주어지는 교육과정을 넘어 학교 안에서 등장하는 교육과정의 모습을 조명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교사가 주어진 교육과정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교사는 교육적 맥락에 맞추어 주어진 교육과정을 조정하거나, 교실 맥락에 적확한 교육과정을 생성하여 가르치는 존재임이 드러났다. 즉 이 분야 연구는 교육과정은 학교 밖에서도 개발하지만, 학교 안에서도 개발한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교육과정 개발의 장을 학교 안팎으로 확장하고, 교사의 역할을 조정자, 개발자로 조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교육과정은 학교 교육의 대중화 과정에서 학교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한 개념으로 통용되었지만(Bobbit, 1918), 교육과정 실행 연구가 등장하면서 교육과정 실행의 장에는 구분이 필요한 서로 다른 교육과정 개념들이 공존한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제도적이고 명시적인 학습 과정(a course of study)을 의미하던 교육과정 개념은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과정(a course of life)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Clandinin, Connelly, 1992: 392). 이중 후자는 대체로 교사와 학생이 로컬에서 만들어 내는 교육과정을 뜻하였고, 이에 따라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교육과정 개념들이 출현하였다. 경험으로서의 교육과정(Doyle, 1922), 교사가 가르친 교육과정과 학생이 배운 교육과정(Cuban, 1992), 교실 차읜 교육과정(Deng & Luke, 2008)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교육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던 다양한 교육과정 개념들을 구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업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던 현상을 교육과정 개념으로 표면화하였다. 이는 교육과정 실행의 장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현상들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현상들을 교육과정적 관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장이 학교 밖에서 학교 안으로 확장하며 연구자들의 관심은 자연히 교사가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발휘하는 전문성으로 향하였다. 교사 전문성과 관련한 논의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기존의 논의들은 대체로 전문성을 발휘하는 대상을 교육과정이 아닌 수업으로 한정하고 그 목적을 교사의 주도적 실행이 아닌 충실한 전달에 초점을 두었다(Ben-Peretz, 1990; Deng, 2017). 그러나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장의 확장은 교사가 주어진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일을 넘어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전문성이 무엇인지에도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첫째, 교사의 교육과정 분석을 바라보는 관점을 확장하였다. 교육과정 분석은 오랜 기간 교사의 교육과정 전문성을 대변해 온 다소 고전적인 개념이다. 이 분야 초창기 연구들은 이때의 교육과정을 주로 외부에서 개발하여 주어지는 교육과정으로 한정하고, 교육과정을 분석하는 행위를 이 교육과정이 어떠한 의도나 배경, 이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인지, 어떠한 목표, 내용, 구조 등으로 이루어졌는지 등을 파악하는 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장이 학교 밖에서 학교 안으로 확장되며 이제 교사의 교육과정 전문성은 외부에서 개발한 교육과정을 사용하는 일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과도 밀접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외부의 교육과정은 내부의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교육과정이라는 관점을 갖고 교사의 교육과정 분석 행위에 접근한 Ben-Peretz(1990)의 교육과정 분석은 주목할 만했다. 이전까지 교사가 교육과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교육과정 자체가 지닌 의도와 의미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일이었다면, Ben-Peretz의 분석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사용하는 맥락에 적절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결정하는 일이었다. 외부의 교육과정이 지닌 가능성은 교실 맥락을 고려하여 교사가 실행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실현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분석하는 일을 외부의 교육과정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과도 밀접하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교사의 교육과정 분석 행위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이런 점에서 교사가 교육과정 분석 능력을 갖추는 것은 교육과정 사용자를 넘어 개발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Ben-Peretz, 1990: 78).
둘째, 교사의 교육과정 해석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교화하였다. 교사는 교육과정을 분석하며 교육과정이 지닌 의도나 목적, 내용 등을 파악하고, 교육과정을 해석하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실행할지를 결정한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형성한 의미는 교사가 내리는 교육적 판단의 기저가 되며, 이들이 모여 교사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이 된다는 점에서 이는 교육과정 개발과도 매우 밀접한 행위이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해석하는 일을 Schwab(1971)은 기예(arts)를 발휘하는 일로, McEwan (1989)은 맥락에 적절한 교수학적(pedagogical) 의미를 마련하는 일로, Kelchtermans(2009)는 자신만의 해석적 틀을 구축하는 일로 설명하였다.
즉 교사는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현장에 실존하는 여러 맥락과 여건을 성찰하고, 자신의 실제에 가장 적확한 이론을 만들어 하나의 실제에 딱 맞는 교육과정을 개발하기도 하며(Schwab, 1971), 교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을 학생이 교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을 고려하여 변환한 지식을 생성하여 가르치기도 한다(McEwan, 1989). 나아가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맥락적이며, 끊임없는 의사결정 과정을 동반하는 만큼, 교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를 지속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교사는 전문적 자기 이해와 주관적 교육 이론에 기반하여 자신만의 해석적 틀을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한다(Kelchtermans, 2009). 이처럼 교사의 교육과정 해석 분야 연구들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교육과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실천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이론이나 지식, 틀 등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를 정교화하였다.
셋째, 교사가 주도적으로 발휘하는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용어로 교육과정 주체성을 개념화하였다. 이는 교사가 발휘하는 행위가 지닌 복잡성과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Priestly, Biesta, Robinson, 2013).
국가교육과정 체제에서 교사가 발휘하는 교육과정 주체성 개념을 탐색한 Alvunger(2018)는 교사가 주체성을 발휘하는 공간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각 공간에서 교사는 어떠한 행위를 주도하는지를 밝혔다. 첫째, ‘공동(collective)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교사는 다른 교사와 함께 주어진 교육과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교사는 주어진 교육과정에 담긴 요구와 핵심 내용을 파악하고, 연간 또는 학기 단위 교육과정을 함께 계획한다. 둘째, ‘개별(individual)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교사는 가르칠 내용을 선정하고, 이때 사용할 자료를 제작하는 등 자신이 가르칠 교육과정과 관련한 활동을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형평성과 표준화를 지향하는 국가교육과정과 교육적 당사자로서 교사와 학생이 지닌 이상과 비전 사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를 다룬다. 이를 통해 교사는 가르치는 교육과정 안에 한편으로는 국가교육과정을 재맥락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컬 차원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담론을 반영한다. 셋째, ‘상호작용(interactive)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교사는 학생의 일상적 경험이 교육적 경험으로 이어지도록 돕는다. 교사가 학생의 경험 형성을 돕는 방식은 주로 학생의 현재 경험을 교과 개념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곧 교과의 계층적 지식 구조(hierarchical knowledge structures)를 학생의 교육적 경험 구조(horizontal knowledge structures)로 만드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가 교육과정을 주도한다는 개념은 교사가 주어진 교육과정을 자신의 교육과정으로 재맥락화하는 과정을 주도한다는 개념이다. 이는 우리나라와 같이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는 국가교육과정이 존재하는 여건에서 교사가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무엇을 주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장에는 주어진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로컬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교육과정 개념들이 공존하였으며, 이렇게 다양한 교육과정 개념 속에서 교사는 때로는 교육과정 사용자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교육과정 개발자로 살아가기도 했다. 이에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교사가 발휘하는 기존의 행위들을 교육과정 개발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기도 하고,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교사의 행위들을 새로운 교육과정 전문성으로 주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전달자, 소비자 등과 같이 비교적 소극적이고, 한정적으로 다루어지던 교육과정 관련 교사의 역할을 사용-개발자(user-developer), 연구자(researcher), 의사 결정자(decision-maker), 개발자(maker) 등과 같이 비교적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개념들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사 개념들은 대체로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메타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첫째, 사용-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이다. Connelly(1972)는 당시 팽배하던 중앙 주도의 교육과정 개발 방식을 하향식 전략, 로컬에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방식을 상향식 전략으로 규정하고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할 때 교육과정의 실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교육과정 개발자를 학교 밖에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외부 개발자(external developer)와 로컬에서 교육과정을 사용하며 개발하는 사용-개발자(user-developer)로 구분하고, 외부 개발자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은 교사의 지혜를 온전히 담지 못하며, 사용-개발자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은 외부 개발자들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이론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학생들에게 좀 더 온전한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외부 개발자가 개발하는 교육과정과 사용-개발자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이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용-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을 근접 목표, 출발점, 방법, 역할의 차이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우선, 외부 개발자는 일반적인 교사와 학생이 사용할 수 있는 ‘자료’ 개발을 근접 목표로 삼지만, 사용-개발자는 ‘실천’을 전제한 교육과정 개발을 근접 목표로 상정한다. 다음으로 외부 개발자는 일반적인 교사와 학생이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이론적 지식이나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반면, 사용-개발자는 교실에서의 실천을 전제로 하는 활동을 구상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교실에서 목격할 수 있는 교육적 필요나 요구로부터 교육과정을 개발한다. 이어서 외부 개발자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은 비교적 보편적인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대체로 명확한 이론을 바탕으로 개발하는 반면, 사용-개발자는 지금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적 당사자, 즉 교사와 학생이 함께 숙의 과정을 거쳐 결정한다. 끝으로 외부에서 개발하는 교육과정은 교육과정에 담긴 의도와 가능성을 교사가 이해하기 쉽도록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하지만, 사용-개발자가 개발한 교육과정은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교실 상황을 최대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사용-개발자로서의 교사 개념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한다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왜 개발한다는 것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하고, 그래서 교사가 개발한 교육과정은 중앙에서 개발한 교육과정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을 좀 더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주었다.
둘째, 연구자로서 교사 개념이다. Stenhouse는 교사가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을 때 학교 교육의 실제가 개선 가능하다고 보았다(Stenhouse, 1975: 142). 그는 특히 교육과정 연구에 있어서 교사를 중시했고, 교사를 교육과정 연구자로 개념화하였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연구한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교사가 가진 교육적 아이디어를 교육과정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Stenhouse는 교육과정을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일로 정의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적 아이디어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교육과정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담고 있는 교육적 의도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교사가 교실에서 만드는 교육과정을 책이나 영상, 게임, 자연환경 등 학생의 학습을 매개하는 물건(educational artefact) 전반으로 조망하였다. 둘째, 교사는 모든 교육과정을 검증하고 평가한다는 의미이다. 교육과정이란 교육적 아이디어를 표현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개발 주체는 다양할 수 있다. 이에 교사는 이러한 교육과정들이 과연 자신이 마주하는 교실 맥락에 적절한 것인지 검증하고, 평가하여 사용해야 한다. 즉 교육과정이란 교육에 대한 모종의 아이디어를 검증 가능한 가설로 변환한 것이기에, 수용의 대상이 아닌 검증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셋째, 교사와 자신이 실행한 교육과정을 성찰한다는 의미이다. 교사는 교육과정 실행 주체로서 자신이 가르친 교육과정과 학생이 배운 교육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외부의 교육과정이 교실에서 어떠한 효과를 내는지를 목격할 수 있다. 이에 교사는 자신의 교육적 아이디어 및 교육적 아이디어를 표현한 교육과정은 적절했는지, 그리고 그 교육과정은 자신의 예상대로 구현되었는지 그렇지 못하였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Stenhouse는 교육과정을 교육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매개물로 보고, 이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은 교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이 곧 교사로서 성장하는 일임을 밝혔다. 이는 한편으로는 교사가 왜 교육과정 개발자가 되어야만 하는지를 당위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한다는 것이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셋째, 의사 결정자로서 교사 개념이다. Bolin(1987)은 중앙 주도 교육과정 개발 방식의 실패를 직접 목격하며, 교육과정이 변화하고 혁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사’를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교육과정을 둘러싼 다양한 가치와 관점 중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선택하는 최종 의사결정자는 결국 교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교사가 늘 교육과정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에 주목하고 다음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교사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은 교육적 의도가 담긴 문서를 만드는 일부터 의도한 문서를 실천하는 일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일련의 연속체였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한다는 것은 주지주의(intellectualism)와 행동주의(activism) 사이에 위치하는 모종의 반성적 실천(praxis)에 해당했다(Bolin, 1987: 100). 둘째,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은 곧 협상을 거친 합의(consensus) 활동이었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장에는 사회, 교과, 학생 차원의 다양한 요구가 공존하며, 교사는 이러한 요구들을 고려하여 한편으로는 최선의 교육적 의사결정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관련성을 회복시켜 교육적 이상을 실현한다.
교사가 주도하는 교육과정 개발에는 로컬의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며 그들의 요구가 곧 교육과정 개발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육과정 개발을 궁극적으로 완성하는 사람은 교사였다.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고, 열광적이며, 새로움이 가득한 교실의 특성으로 인하여 교육과정의 의도와 실제 간의 연결(link)은 언제나 약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교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서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궁극적인 의사결정자였다(Bolin, 1987: 97).
셋째, 개발자로서의 교사 개념이다. Claninin, Connlly(1992)는 지금까지의 교육과정 개발 분야 연구물들을 종합 검토하여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음을 밝히고, 교육과정 관련 교사 역할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교사가 하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사가 사용한 개인적 실천적 지식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교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Claninin, Connelly, 1992: 363).
이후에도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을 탐구하는 연구들은 꾸준히 이어졌다. Shawer(2010)는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방식과 전략들을 살펴보면서, 교사를 교육과정 전달자(transmitter), 교육과정 개선자(developer), 교육과정 개발자(maker)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교육과정 전달자를 교과서를 중심으로 순차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모습으로, 교육과정 개선자를 교과서를 기본 자료로 간주하되 필요에 따라 일부만 사용하기도 하고, 일부를 조정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모습으로, 교육과정 개발자를 교과서를 다양한 학습 자료 중 하나로 간주하여 사용하는 모습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Claninin, Connlly(1992)이 제시한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을 좀 더 실체화하고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Mitchell(2017)은 교육과정 개발을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만들고 경험하는 교육과정’으로 정의하며,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기존의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관점을 다소 유연하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교육과정 개발에 관한 Mitchell (2017)의 관점은 이전보다 더욱 로컬 기반적이고, 즉흥적이며, 학습자 중심적이었다(Mitchell, 2017: 100). 이에 그는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하면서 하는 일을 고려할 때 교사를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사람’을 넘어 ‘교육과정을 창안하는 사람’으로 표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교사를 교육과정 개선자를 넘어 교육과정 개발자로 구분한 Shawer(2010)의 관점과도 유사하다.
이처럼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개념은 Claninin, Connelly(1992)의 연구를 통하여 존재론적 가능성을 확인하였고, Shawer(2010)와 Mitchell(2017)의 연구들로부터 좀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결국,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교사 담론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담론이 탄생한 것이라기보다는 교실을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하고, 이때 교사가 하는 일을 교육과정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재조명한 결과 드러난 담론에 더 가까웠다. 다만 연구자에 따라 이를 사용-개발자, 연구자, 의사결정자, 개발자라는 이름으로 칭하였을 뿐이다.
III. 국내에서의 교사와 교육과정 관련 논의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더욱 밀접해진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에 주목하고, 교사를 매개로 하여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논의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이 장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정책적 차원과 실천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단, 이 장에서는 이 둘을 서로 다른 독립적인 절로 제시하였으나 실제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정책적 차원에서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은 교육과정 관련 정책을 통제에서 개방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교육과정과 관련한 전반적인 의사결정을 국가가 주도하며 전반적인 교육의 질을 평준화 및 표준화시키는 데 집중해 왔다(정영근, 2012: 112). 그 결과 우리나라 학생들은 단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될 수는 있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학생’이 될 수는 없었다(OECD, 2006: 50). 이에 우리나라는 높은 수준의 학업 성취로 대변되는 양적인 성장을 넘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학교생활을 담보하는 질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교육과정 정책을 통제에서 개방의 형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정광순, 2012: 5).
교육과정 정책을 통제에서 개방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그간 중앙에서 독점해 오던 교육과정 관련 권한을 로컬(시·도, 학교, 교실 등)과 나눈다는 의미였다. 학교 교육의 질적 성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학생이 배우는 교육과정 안에 국가 차원의 요구는 물론 배움과 관련한 학생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방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곧 지식교육의 가치를 폄훼하거나 학생이 원하는 활동만을 중시하는 수업을 지향하는 것은 아닌 만큼, 학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배움에 대한 학생의 요구와 국가 차원의 요구 중 전자만을 중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일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이상은, 2022: 93).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던 국가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교사는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장에 공존하는 다양한 요구를 적절하게 조율하여 최선의 교육적 경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적임자이기 때문이다(Aoki, 1991; Mitchell, 2017).
우리나라는 6차 교육과정 시기 이후 교육과정 결정의 분권화를 표방하며 교육과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와 로컬 차원으로 분산하였다(서경혜, 2016: 219). 교육과정 분권화 정책은 자연스럽게 교육과정 지역화, 다양화를 촉진하였으며 그 결과 국가교육과정으로 일원화되어 있던 교육과정 개념은 국가교육과정, 시·도교육과정, 학교교육과정, 교실교육과정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국가교육과정은 후속하는 로컬교육과정의 기준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대체로 학자가 주도하여 개발하는 교육과정이었다면, 로컬교육과정은 지역, 학교, 교실에서 살아가는 학생의 삶과 흥미, 수준 등에 기초하여 개발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교사가 주도하여 개발하는 교육과정이었다(유성열, 정광순, 2021: 50). 이러한 로컬교육과정은 교사가 로컬 차원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육적 요구와 맥락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발하는 교육과정을 뜻한다는 점에서 교사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교육과정을 교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교사의 역할을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을 충실히 가르치는 것으로 규정해왔다는 점에서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는 다소 수직적이었고, 그러한 교육과정에 교사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교육과정 결정의 분권화는 교육과정 개념의 다변화와 함께 교육과정 사용자를 넘어 개발자로서의 교사 역할을 표면화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를 좀 더 수평적인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교사교육과정은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를 좀 더 민주적이고, 적극적으로 조망하도록 돕는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정책적 차원의 논의가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한 논의라면 실천적 차원의 논의는 현장에서 주도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국가 차원에서 형성되어 온 정책 담론과 현장 차원에서 발전해 온 실천 담론은 서로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소경희, 최유리, 2022: 75)라는 점에서 이 둘을 명료하게 구분하여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에 앞 절에서 국가 차원에서 주도한 논의에 주목하였다면, 이 장에서는 현장 차원에서 주도한 논의를 주로 다루었다.
교육과정 재구성은 현장으로부터 발아한 대표적인 교사와 교육과정 관련 담론이자 논의이다(정광순, 2012; 이윤미, 2020).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교사의 역할을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을 충실히 가르치는 일로 규정해왔기 때문에 교사가 교육과정에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교육과정 재구성은 교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을 학교나 교실 맥락에 맞추어 가르치는 현상이자 행위를 대변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를 이전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교육과정 재구성은 오랜 기간 수업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려오던 교사의 일을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교육과정 재구성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행위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교사가 재구성하여 가르치는 교육과정의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서명석, 2011; 서경혜, 2016)에서 교육과정과 수업이라는 전통적인 관계를 주어지는 교육과정과 가르치는 교육과정 간의 관계로 확장하였다. 이는 교육과정과 수업을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여겨오던 기존의 관점을 넘어 수업 또한 그 본연의 목적을 갖고 개발되는 (주어진 교육과정과는 다른) 또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사의 일을 수업을 넘어 교육과정으로도 조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최근 교육과정 재구성 개념이 현장에서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행위 및 현상을 대변하기에는 다소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서명석, 2011; 서경혜, 2016). 교육과정 재구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이나 실제 교육과정 재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교육과정이 과연 국가교육과정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위해 개발한 교과서를 지칭하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전자라면 교사가 실제로 국가교육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권한은 있는 것인지, 있다면 교사는 어디까지 재구성할 수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으며, 후자라면 그것은 교육과정 재구성보다는 교과서 재구성으로 명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담론은 교육과정과 관련한 교사의 역할 논의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교사의 역할을 국가교육과정을 충실히 가르치는 사용자이자 전달자로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학생에게 가장 적확한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가르치는 개발자이자 창조자로 바라볼 것인지 이분화된 관점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재고가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나라와 같이 국가교육과정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에서 교사가 과연 국가교육과정을 가르칠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둘이 과연 같은 교육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서로 다른 두 역할을 뜻하냐는 점이다. 서명석(2011)은 전자를 교육과정을 하나의 완성된 실체로 바라보는 실체관의 입장으로, 후자를 교육과정을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보는 텍스트관의 입장으로 규정하고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적 시차가 교사와 교육과정 사이에 다양한 모순과 혼란을 빚어낸다고 보았다. 즉 교사를 교육과정 사용자로 바라볼 것인지 개발자로 바라볼 것인지는 이분화된 두 관점이 아닌 교육과정 관련 교사의 역할을 사용자를 넘어 개발자로도 바라볼 수 있는 확장된 관점을 뜻하며, 이는 교사가 사용하는 교육과정과 개발하는 교육과정을 서로 다른 두 교육과정으로 구분하여 바라볼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두 차원의 논의, 즉 교육과정 결정의 분권화로 대표되는 정책적 차원의 논의와 교육과정 재구성 현상으로 촉발된 실천적 논의를 통해 우리나라도 교사와 교육과정 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교사가 발휘하는 교육과정 행위와 역할, 전문성 등과 관련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교육과정 생태계를 기존의 중앙 중심에서 로컬 중심으로 전환함으로써 교사가 교육과정을 실행하는 장에 마주하는 교육과정 개념의 다변화를 유도하였다.
IV.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 고찰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장이 학교 밖에서 안으로 확장하며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다. 이러한 담론은 교사의 일을 수업을 넘어 교육과정과도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교육과정 관련 교사 개념을 사용자, 전달자 등으로 대표되는 수로관 메타포를 넘어 사용-개발자, 연구자, 의사결정자 등 개발자 이미지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에서 좀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을 취하였다.
다만 2장에서 살펴본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과 3장에서 검토한 국내 교사와 교육과정 관련 논의는 서로 다른 교육적 문화와 맥락에서 형성되고 발전해 온 것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령 북미나 유럽에 속한 국가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와 같이 강력한 국가교육과정 체제를 취하고 있지 않으며, 교사가 자신의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가르친다는 인식이 보편적인 편이다(정광순, 2021: 36). 이에 서구의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은 교사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교사가 이미 하고 있던 일들을 교육과정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이와 관련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교육과정 분권화, 자율화, 다양화 등 교육과정 결정 권한을 중앙에서 로컬로 이양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이어오고 있지만, 여전히 국가교육과정이 교사의 교육과정 실행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서경혜, 2016; 이윤미, 2020). 그 결과 교사의 교육과정 실행 양상은 성취기준을 내용으로 사용하는 모습부터 기준으로 사용하는 모습까지 이전보다 다양해졌으나 여전히 주어진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익숙하고, 자신이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가르치고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교사도 상당수 있다(유성열, 정광순, 2021).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교 밖에서 개발하는 교육과정과 학교 안에서 개발하는 교육과정은 각자만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지닌다. 그리고 두 교육과정이 각자의 역할을 다할 때 학생에게 비로소 온전한 교육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Alvunger, 2018; Connelly, 1972). 우리나라도 그간 학교 밖에서 개발하는 교육과정과 학교 안에서 개발하는 교육과정 간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해왔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는 7차 교육과정 시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교육과정’을 표방하며, 학교 현장이 ‘주어지는 교육과정’의 틀에서 벗어나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였다(교육부, 1999: 15-16). 이는 교육과정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해석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취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교육과정을 텍스트로 바라본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하나는 텍스트를 미결정 상태로 두고 텍스트 자체가 지닌 내적 관계와 구조에 주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를 실제적 담화와 연결함으로써 텍스트가 지닌 의미론적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활성화하는 것이다(Ricoeur, 2003: 180). 전자는 교육과정이 지닌 본래의 의미와 의도를 파악하는 일에 중점을 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국가) 교육과정 사용자로서의 교사 역할과, 후자는 교실 맥락에 가장 적확한 의미를 결정짓고 실행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로컬) 교육과정 개발자로서의 교사 역할과 관련이 깊다. 즉 교육과정을 텍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은 교육과정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바라볼 때와는 다른 교사의 위상과 역할을 요청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육과정은 학교 밖에서 개발하여 교사에게 주어지는 텍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교실 맥락 속에서 교사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Aoki, 1991; 서명석, 2011).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산물이 바로 교육과정 재구성이었으나, 교육과정 재구성은 여전히 국가교육과정에 종속된 개념이었기 때문에 학교 밖 교육과정과 학교 안 교육과정 간의 균형을 온전히 회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교사가 교실에서 실행하는 교육과정에 주목한 연구들은 이를 학교 밖에서 개발하여 교실에서 주어진 교육과정을 재구성한 교육과정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교사가 가르친 교육과정(Cuban, 1992), 교실 차원에서 개발한 교육과정(Deng, Luke, 2008), 교사가 개발한 교육과정(Mitchell, 2017) 등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교사의 교육과정 관련 행위를 나타내는 분석, 해석, 주체성 등의 개념은 궁극적으로 교사가 로컬에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행위이자 전문성을 뜻하였다. 이런 점에서 국내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은 교육과정 개념은 물론 이와 관련한 교사 역할을 좀 더 민주적인 관점에서 논의하고,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 학교 밖에서 외부 개발자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과 학교 안에서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을 동등한 교육과정 개발 행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을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문제로 본다면, 국가 차원에서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것을 국가교육과정 개발이라 부르듯이 교사 차원에서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것을 교사교육과정 개발로 부를 수 있다.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맥락과 배경, 근거 등은 다를 수 있지만 가르칠 것을 결정한다는 근본적인 행위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서명석, 2011; Deng, Luke, 2008). 즉 외부 개발자가 국가·사회적 요구, 학문에 근거하여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것과 교사가 학생의 요구, 교육적 맥락에 근거하여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목적과 역할, 기능의 차이일 뿐 질적인 차이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Connelly, 1972; Mitchell, 2017). 이에 교사가 개발하는 교육과정을 교사가 아무런 기준이나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가르칠 것을 선정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분명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국가가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행위를 교육과정 개발 행위로 보듯이 교사가 가르칠 것을 결정하는 행위도 교육과정 개발 행위로 바라보는 것은 진정으로 교육과정 분권화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동안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던 교육과정 개념 간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둘째, 교사의 교육과정 전문성은 궁극적으로 교사교육과정 개발을 지향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에서 살펴본 교육과정 전문성 담론에 따르면 교사가 교육과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곧 교육과정을 사용하는 맥락에 적절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Ben-Peretz, 1990)이고, 교육과정을 해석한다는 것은 자신이 파악한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실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Kelthermans, 2009)이며, 교육과정 주체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곧 주어진 교육과정을 자신의 교육과정으로 재맥락화하는 과정을 주도하는 일(Alvunger, 2018)이었다. 직접적 관련성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결국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파악하고, 결정하고, 생성하는 일이었다. 즉 교사가 발휘하는 교육과정 전문성을 곧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교사가 하는 일로 바라본다면, 교사의 교육과정 일이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파악하고, 결정하고, 생성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교사교육과정 개발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교사는 국가교육과정 사용자이자 교사교육과정 개발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사는 국가교육과정을 가르쳐야 할 의무와 학생을 가르쳐야 할 의무를 동시에 지닌다(Bolin, 1987; Alvunger, 2018). 우리나라에서 국가교육과정은 기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교사는 국가 교육과정이 정한 기준과 관련지어 학생의 흥미, 요구, 수준 등에 적절한 내용을 선정하여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선정할 권한은 교사에게 있으며,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은 국가에서 정한 내용 및 시간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교육과정은 교사교육과정을 통해서만 학생에게 전해질 수 있고, 교사교육과정은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즉 교사가 국가교육과정을 사용하는 일과 교사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호배타적 행위가 아닌 서로가 함께일 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상호보완적 행위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이 온전히 조화를 이룰 때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은 최소한의 공통성과 최대한의 다양성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V. 결론
우리는 서사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언어나 행위로 드러냄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에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체성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김동현, 2021: 71). 이때 시간과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을 서사라고 한다면,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은 교사의 정체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서사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은 교육과정 관련 권한을 중앙에서 로컬로 이양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정광순, 2021: 34). 교육과정 관련 권한을 중앙이 독점하던 시절 교사의 정체성은 주어진 교육과정을 충실히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과정 관련 권한이 중앙에서 로컬로 이양되며 교육과정 실행의 장에는 주어진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이에 후속하여 개발하는 다양한 로컬교육과정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변화된 교육과정 개념 속에서 교사는 국가교육과정 사용자이자 로컬교육과정 개발자로 살아간다(유성열, 정광순, 2021: 53).
그렇다면 오늘날 교사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교사의 정체성은 과연 교육과정 관련 권한을 중앙에서 독점하던 시절과 달라졌다고 볼 수 있는가.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을 교사를 둘러싼 교육과정 개념과 관련지어 바라본다면 이전보다 좀 더 풍부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정체성은 과연 주어진 교육과정을 잘 가르치는 일을 넘어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교사에게 ‘학생에게 적확한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가르쳤는가’보다는 ‘주어진 교육과정을 충실히 가르쳤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서구의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을 되돌아보면,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장이 학교 밖에서 안으로 변화한 이후 이들은 교사가 살아가는 교육과정 생태계에 주목하고, 이 안에서 교사는 각 교육과정을 어떻게 매개하며 그 과정에서 발휘하는 전문성은 무엇이고 이때 교사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교사를 중심으로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이 형성되고 발전해나가자 교사의 정체성은 자연히 수로관에서 개발자로 변화하였다.
반면 국내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은 여전히 교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보다는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그 결과 교사를 둘러싼 교육과정 생태계는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정체성은 여전히 주어진 교육과정을 충실히 가르치는 것에 머물러 있다.
이제 우리는 교사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이야기는 교사 자신의 이야기이며, 학생과 함께 교육과정을 실행해나가는 이야기이고, 교육과정 실행의 장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교과, 학생, 환경, 교사 등)를 매개하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 교사들은 실제로 어떠한 교육과정 생태계에서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어떠한 딜레마에 직면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하며 살아가는지 등 교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Clandinin, Connelly, 1992: 392). 그리고 연구자는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교사가 하는 다양한 역할을 탐색하고, 이렇게 탐색한 역할에 맞는 교사 개념들을 생산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축적될 수 있을 때 우리나라 고유의 교사와 교육과정 담론이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담론이 곧 우리 사회의 교사 정체성을 만들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