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우리 사회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 같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교육 변화에 대한 요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OECD에서는 학생이 미래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적극성과 주도성, 책임감을 지닌 인재로 양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Education 2030」 프로젝트를 발표하였다(OECD, 2018). OECD의 이 프로젝트에서는 무엇보다 학생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학생들이 활동적이고 책임감 있으며 적극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학습할 것인지를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하도록 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OECD, 2018).
최근 한국에서도 미래 교육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함께 교육과정에 학생의 행위주체성을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행위주체성을 신장시킬 수 있는 방안이자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기제로 주목받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기초 소양과 기본 학력을 바탕으로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누적하여 졸업하는 제도로서(교육부, 2021a: p. 9), 학생에게 과목 선택권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교육과정 운영 방식과 차이가 있다.
사실 고교학점제 시행 이전에도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은 국가 교육과정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확대 운영되어 왔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 “개별 학생은 자신이 선택하여 이수한 과목들을 모아 자신의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을 강조하며 이른바 ߢ학생 중심 교육과정ߣ을 표방한 이후(교육부, 1997),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에게 교과목 선택권을 부여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국가 교육과정은 학생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종래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서 강조하였던 학생의 과목 선택이 소극적이고 제한적이라는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소경희, 2002; 허예지, 소경희, 2014; 홍후조, 2001).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서 이루어진 학생의 과목 선택은 개별 학생의 선택이 아닌 ߢ학교의 선택ߣ인 경우가 많으며,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개별 ߢ과목ߣ을 선택하기보다 문·이과 등 몇 개의 트랙으로 나누어진 ߢ과정ߣ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는 기존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 운영 방식과 달리 학생의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을 기반으로 교육과정이 개발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곧, 기존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서는 교사들이 학생의 필요를 예상하고 학교의 인프라를 고려하여 몇 개의 선택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에게 제공하였다면, 고교학점제에서는 학생의 수요조사를 거쳐 학교에서 개설할 과목이 정해지며 개별 학생은 수강 신청을 통해 자신이 이수할 과목을 확정하게 된다(교육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1: p. 33). 이와 같이 고교학점제에서 학교 교육과정은 학생의 희망과 선택을 근간으로 편성·운영되기 때문에, 학생이 참여하는 양상이나 그것이 갖는 의미 또한 기존의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나타난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쟁점들이 도출되는가?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인해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역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 개발의 주체로서 ߢ학생ߣ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한 선행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고교학점제와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주로 학생의 수요를 반영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의 편성 실태나 사례에 관심이 많았으며(김연, 2020; 김현미 외, 2020), 고교학점제에서의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에 대한 교사의 인식을 조사하거나(김진숙 외, 2019; 유동훈, 김은수, 모영민, 2020; 이상은, 백선희, 2019a), 고교학점제 교육과정과 관련된 쟁점으로 일부 학생의 수요나 희망에 대해 언급한 연구(강현석, 2018; 이상은, 장덕호, 2019; 주주자, 2018; 한혜정, 2019)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른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서 ߢ학생ߣ에 주목한 연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고교학점제에서의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에 대한 학생의 인식을 설문조사로 분석한 연구(이상은, 백선희, 2019b)와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의 선택 경향성을 분석한 연구(김동욱, 2019), 학생의 교과목 수요에 따른 교원 수급에 대한 쟁점을 다룬 연구(허주 외, 2020) 등이 수행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들은 고교학점제의 학교 교육과정과 관련된 학생 변인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들과 차이가 있다. 이 연구들은 설문조사 등의 연구 방법을 통해 고교학점제에서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학생의 인식이나 실태의 경향성을 보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구체적인 양상이나 이러한 학생 참여가 교육과정 개발에 가지는 의미, 이와 관련된 쟁점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른 선택 중심 교육과정의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양상과 이와 관련된 쟁점을 탐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본 연구는 기존의 선행연구들이 교사 및 학생 대상의 설문조사나 담론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라 실제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개발하거나 이를 지원해 온 참여자의 목소리와 경험에 토대를 두어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 차이가 있다.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 설정한 연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선택 중심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이는 학교 교육과정 개발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둘째, 고교학점제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와 관련된 쟁점은 무엇인가?
셋째, 고교학점제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가 더욱 유의미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지원 방안은 무엇인가?
II. 이론적 배경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기존의 담론들을 살펴보면,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의 참여자로 고려하기보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ߢ자원(source)ߣ으로서 간주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 시 주요한 의사결정의 자원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은 진보주의가 등장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Pestalozzi나 Froebel 등의 유럽 교육학자들은 아동의 자연스런 발달과 경험을 존중하는 교육을 주장하였고, 이 같은 아동 중심 교육은 19세기 말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소경희, 2017). 진보주의 교육 운동이 등장하면서 당시 학문의 내재적 가치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결정하던 방식에 대한 도전과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학습자인 학생에 대한 고려가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경험 중심 교육과정을 주장한 Dewey(1916, 1938)에 따르면, 학교 교육과정의 내용 선정 및 조직에서 교과는 학습자의 현재 경험으로부터 추론될 필요가 있다. 곧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학생의 일상 경험에서 출발하여 학생이 지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아동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실제로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 과정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일에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 시 의사 결정의 주요 자원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교육과정 개발을 위한 구체적인 모형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예컨대 Tyler(1949)부터 Schwab(1973)에 이르는 여러 교육과정 개발 모형에서는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로서 학습자를 강조하고 있다. 고전적 자료이긴 하지만 Fantini & Weinstein(1970)도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교과 지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학생의 요구, 경험, 흥미, 학습 수준 등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교육과정 개발의 중심을 학습자 개인에 두고 학생의 요구와 관심에 부응할 수 있도록 교육내용과 교수·학습 방법 등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보다 최근에 출간된 Omstein & Hunkins(2003)의 연구에서는 교육과정 설계를 위한 주요 자원으로서 ߢ과학ߣ, ߢ사회ߣ, ߢ영원한 진리와 신의 의지ߣ, ߢ지식ߣ, ߢ학습자ߣ를 제시하며, 교육과정이 학습자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즉 학습자의 학습 방식, 태도, 흥미 등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도출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이 기존의 연구들은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의 ߢ자원ߣ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의 ߢ자원ߣ으로 간주하는 차원을 넘어서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의 중요한 ߢ참여자ߣ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주목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교육과정 관련 의사결정 행위에 학생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전통적인 학교교육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이고 폐쇄적인 틀을 비판하며 다양한 학교 개혁안을 제시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교육과정 개발 모형에 대한 대안으로서 해방교육학을 강조한 Freire(1970)의 경우, 현실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에 대한 피억압자의 각성과 해방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를 위한 교육과정 개발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때, 교육은 대등한 사람들 간의 대화이며,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을 위한 민주적인 공동작업자로 재인식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한편, 학교교육에서 나타나는 지배-복종의 인간관계를 비판한 Kohl(1969) 또한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흥미와 요구에 따른 적절한 교육과정을 선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교사는 학생에게 선택할 기회를 부여하고 학생으로부터 교육과정이 자연스럽게 발전되어 나오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입장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을 단순히 의사 결정 시 고려해야 할 자원으로 간주하기보다 교육과정의 방향이 학생으로부터 직접 추구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학생 참여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으나, 실제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 참여는 대부분 “학생의 요구나 필요, 흥미 등을 교사에게 알리는 일”(이귀윤, 1997: p. 241)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요구나 필요, 흥미를 교사에게 알리면, 교사가 이를 학교 교육과정에 선택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학교 교육과정이 편성·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 학교에서는 교사가 교육과정 개발의 주체가 되어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학생의 행위주체성을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실현하는 데에도 다소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 고등학교는 고교학점제라는 새로운 정책의 도입에 따라 교육과정의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부터 고교학점제 정책 도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여(교육부, 2016), 2018년부터 고교학점제 연구학교가 지정·운영되었으며, 2021년에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 계획(2021. 2. 16.)」과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을 위한 단계적 이행 계획(안)(2021. 8. 23.)」이 연달아 발표되면서 향후 2025년 본격적인 고교학점제 도입·적용을 앞두고 구체적인 방안들이 마련되고 있는 중이다(교육부, 2021a, 2021b).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자신의 진로·적성을 고려하여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하여 학점을 취득한 후 졸업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에(교육부, 2021a: p. 9), 학생이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은 고교학점제 운영을 위한 필수 조건이나 전제 조건으로 강조된다(이광우 외, 2017). 따라서 고교학점제를 시범 운영하고 있는 연구학교에서는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실제로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 개설한 선택 과목 수의 추이를 분석한 결과, 연구학교 운영 이전보다 연구학교 운영 이후에 평균 9.3개의 선택 과목(약 30%)이 더욱 많아진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김현미 외, 2020: p. 95).
그러나 고교학점제의 교육과정이 단순히 선택 과목 수를 확대 개설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고교학점제의 교육과정이 이전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과 다른 측면은 개설 과목이 이전보다 더욱 많아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과정의 개설 과목이 학생의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 결과를 토대로 확정된다는 데 있다. 즉, 고교학점제에서의 교육과정은 선택 과목에 대한 학생의 수요조사와 수강 신청 절차를 통해 학생 개개인의 수요를 반영한 교육과정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주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교육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1: p. 5). 실제로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개설 희망 과목에 대한 학생의 수요조사를 1~3차례, 수강 신청 또한 1~3차례 실시하여 개설 과목을 확정하고 있었는데(김현미 외, 2020: pp. 154-156), 이러한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은 이전에서는 적극적으로 실시하지 않았던 교육과정 결정 방식으로서 앞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고려된다. 즉, 교교학점제는 종래의 선택형 교육과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의 핵심 축에 ߢ학생ߣ을 둠으로써 교사 정원에 맞추어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해온 관례에서 벗어나도록 일선 고등학교의 변화를 요구하게 될 것으로 논의된다(이상은, 장덕호, 2019: p. 114).
한편,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의 수요조사 및 과목 선택 결과를 중심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쟁점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상은과 장덕호(2019: p. 131)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의 상당수 학교에서 학생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종래 교사 중심 교육과정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이러한 일의 전제 조건으로서 진로 지도 및 학생·학부모의 공감대 형성 등이 부족한 것으로 보고하며 이에 대한 개선을 주장하였다. , 김연(2020: p. 63)은 학생들이 개별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기보다 ߢ과정ߣ을 설치하여 학생의 과목 선택에 대한 혼란을 막고 과목 선택을 가이드 한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다고 보고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이 개별 과목을 선택할 역량을 아직 갖추지 못했음을 유추해보게 한다. 한편, 이주연 외(2020: p. 157)는 교사 대상 설문조사를 통해 학생이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과목을 맡아줄 교사가 부족한 문제를 고교학점제 교육과정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여, 선택 중심 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현실적인 여건이 부족함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상은과 백선희(2019b: p. 80)는 학생의 과목 선택 경향을 분석한 결과 성적이 높다고 인식하는 학생일수록, 교육 기대 수준이 높은 학생일수록,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가정형편이 좋다고 인식할수록 과목 선택의 정도 및 자신의 적성과 흥미와 부합하는 정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는데, 이는 고교학점제에서 개별 학생 간 과목 선택의 질적인 수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연구들은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인한 변화와 이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데에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의 시행이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학생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학생 참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는 교육과정 개발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선행연구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고 있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탐색하는 한편, 학생 참여 과정에서 제기되는 교육과정 쟁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III. 연구 방법
이 연구는 고교학점제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양상과 쟁점을 더욱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 질적연구 방법을 활용하였으며, 연구 대상의 경우 목적 표집 방식(purposive sampling strategy)을 활용하여(Creswell & Clark, 2011),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교사와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의 교육과정을 모니터링하면서 지원해준 장학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고교학점제에서의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학생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여 직접적으로 조사할 수 있으나, 학교 교육과정이 학생의 참여뿐만 아니라 학교의 상황과 여건을 고려하여 개발·확정되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정과 관련된 종합적인 상황과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는 교육과정 담당 교사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한편, 고교학점제 연구학교가 일부 학교에 국한되어 있고 연구학교 운영 연한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의 교육과정 업무 담당 교사도 자신의 학교 상황에 국한하여 경험과 고민을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을 것으로 고려되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관내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들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 편성·운영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지원하고 있는 고교학점제 업무 담당 장학사도 면담 대상자에 일부 포함하여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 대한 종합적인 상황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 더욱 풍부하게 논의할 수 있도록 면담조사 대상자를 선정하였다. 최종적으로 이 연구의 면담조사에 참여한 대상자는 다음의 <표 1>과 같다.
이 연구의 참여자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 교육과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 7명과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를 지원하며 교육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장학사 2명이다. 교직경력은 최소 7년부터 최대 30년까지 다양하나, 평균 17년 이상으로 대체로 고경력 교사에 해당하는 교사가 많았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는 면담 참여자들이 총 5개 시․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교사뿐만 아니라 읍면지역의 소규모 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교사도 있어 각기 다른 학교 상황을 논의해주었다. 이 연구에 참여한 7명의 교사가 소속된 학교는 모두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이며, 그중 3년차 연구학교는 4개교, 2년차 연구학교는 3개교로서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2~3년에 걸쳐 개발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자료 수집은 주로 면담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여 원격미팅 프로그램을 통한 화상면담을 실시하였다. 면담을 위해 개발된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표 2>와 같으며, 면담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후속 질문들을 추가하며 진행하였다.
자료 수집을 위한 면담은 2020년 12월 한 달간 이루어졌으며, 연구 참여자별로 1회씩 약 1시간 가량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때 모든 면담의 내용은 녹음되어 면담을 마친 뒤 전사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전사된 자료는 연구 분석 과정의 원자료로 활용되었다. 면담조사에 대한 분석은 전사된 내용을 토대로 코딩 작업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이러한 코딩 작업은 이론적 배경에 기반하여 이루어졌다. 즉, 본 연구는 연구 주제와 관련된 연구와 문헌을 토대로 코드를 추출하여 분석에 적용하는 방법을 활용하여(DeCuir-Cunby, Marshall & McCulloch, 2011), 고교학점제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을 의사결정의 ߢ자원ߣ으로 고려하는 사례, 학생의 요구와 과목 선택 결과를 중심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사례, 이보다 진일보하여 학생의 요구와 과목 선택 결과를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사례로 구분하여 코딩 작업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양상뿐만 아니라 면담 참여자들이 제기한 학생 참여 관련 쟁점들을 각각의 주제별로 유형화하여 코딩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한편, 이러한 코딩 과정은 연구진 간의 지속적인 검토와 논의를 통해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최종 코딩의 결과를 교육과정 전공 박사 학위 소지자 2명에게 검토를 받음으로써 분석 결과의 타당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IV. 연구 결과
고교학점제에서는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택 과목을 확대·개설하여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게 된다.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는 과정에서 학생 참여 양상과 교육과정 개발에서의 의미를 분석한 결과, (1) 교사들은 학생을 중요한 ߢ교육과정 개발의 자원ߣ으로 고려하거나, (2) 학생을 중요한 ߢ교육과정 개발의 참여자ߣ로 고려하기도 하였으며, (3) 학교 교육과정의 변화를 촉구하는 ߢ교육과정 변화의 촉진자ߣ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각의 참여 양상 및 교육과정 개발에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는 과정에서 학생을 의사 결정을 위한 하나의 주요한 ߢ자원(source)ߣ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면담조사에서 이러한 의미를 강조한 교사들은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를 운영하면서 이전과 달리 학생이 흥미를 가지거나 필요로 하는 과목들이 무엇인지 예측하고 논의하며 선택 과목을 확대·개설하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곧, 학교 교육과정 의사결정의 주체는 여전히 교사이지만,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생을 의사 결정의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하여 학생의 흥미와 필요에 근거하여 기존보다 선택 과목을 확대 개설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희 같은 경우는 대안적 교육과정을 많이 운영해요. 인문학적 감성과 미술이나 역사와 관련된 과목부터 인공지능과 미래사회 이런 식의 과목들이요. 아이들의 다양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되는 과목들을 선생님들이 개설하세요. (교육과정에) 이런 아이들을 받아 안기 위해서요. 그랬을 때 아이들은 상당히 그런 과목들을 좋아하죠. 신청도 많이 하고요. [B교사]
이러한 의견을 개진한 면담 참여자들은 교육과정 편성․운영을 위한 의사 결정을 할 때 학생의 흥미와 필요를 고려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으로 학교의 상황과 요건이 여전히 중요함을 논의하였다. 특히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운영 경험이 부족한 학교나 읍면 지역의 소규모 학교의 경우, 학생들의 필요와 흥미 등을 고려하여 선택 과목을 개설하기에는 학교 여건과 교사 수급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의 수요만을 근거로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따라 일부 학교에서는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할 때 교사가 ߢ사전에ߣ 학생의 필요와 흥미를 ߢ예측ߣ하고 학교의 상황과 여건을 함께 고려하여 ߢ개설 가능한ߣ 선택 과목들을 어느 정도 확정한 다음, 학생의 수요조사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있었다.
순서를 말씀드리면, 해당 과목을 가르칠 교강사 부분이 확보가 된 과목들을 대상으로 해서 아이들의 수강 신청을 받아요. (중략) 교양 과목들이 문제이거든요. 교과가 따로 편제되어 있지 않은 교양 교과 과목은 교과협의회와 교육과정협의회에서 (교양 과목을) 어떤 교과에서 담당할 것인지, 우리가 개설할 수 없는 과목은 무엇인지에 대해 미리 논의가 된 이후에 아이들한테 수강신청을 받습니다. [D교사]
이와 같이 학생을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의사결정의 중요한 ߢ자원ߣ으로 고려하는 입장은, 학생이 희망하거나 필요로 하는 과목을 고려하여 개설 가능한 과목을 확대해간다는 점에서, 이전의 교사 중심 교육과정에서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변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학생은 교육과정 관련 의사 결정에서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ߢ자원ߣ으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만, 의사결정의 주체는 여전히 교사이며 학생의 수요뿐만 아니라 학교의 여건이나 상황도 중요한 의사결정의 중요한 자원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에 다룰 입장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을 운영할 때 학생이 교육과정 개발의 주요 ߢ참여자ߣ로서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학생을 의사결정을 위한 하나의 ߢ자원ߣ으로서 고려하는 경우에는 교사가 학생의 필요를 고려하기는 하였으나 의사 결정의 주체는 여전히 교사였던 반면, 학생이 교육과정 개발의 주요 참여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경우, 교육과정 관련 의사 결정에 학생이 일정 정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교학점제에서 학교가 실제로 운영하는 교육과정은 학생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 결과를 토대로 확정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부 읍면지역의 소규모 학교의 경우, 학생의 수요를 예측하고 학교의 상황을 고려하여 ߢ개설 가능한 선택 과목ߣ을 확정한 다음에 학생의 수요조사를 받는 반면, 많은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학생의 수요조사를 여러 차례 실시하면서 개설 가능한 선택 과목을 추려나가고 있었으며, 개설하기로 결정된 과목들을 토대로 학생의 수강 신청을 받아 실제 운영하게 될 학교 교육과정을 확정하고 있었다.
먼저 수요조사의 경우 교사들이 현실적 요건을 고려하여 실제로 개설 가능한 과목들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조사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학교에서 국가 교육과정에 제시된 ߢ모든ߣ 과목을 학생의 선택의 범위로 제공하고 학생 수요조사를 실시한 다음, 그 결과를 토대로 교사들이 개설 가능한 과목을 추후에 논의하는 방식으로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요조사는 1회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수요가 낮게 나오는 과목을 제하여 가는 방식으로 2~3회 실시하기도 하였다.
(교육과정) 편성표를 (확정하거나) 선택 과목을 개설할 때, 학생 수요조사를 해요. (중략) 학생들한테 연말에 희망하는 과목이 있는지 한 번 (의견을) 받고요.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리 학교에 개설되는 과목군을 가지고 수요조사를 해요. (수강 신청으로 과목) 선택하기 전에 가수요조사를 하고, 또 한번 수요조사를 만들어서 원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해요. [C교사]
학교 교육과정으로 개설할 선택 과목이 확정된 이후에는 개별 학생별로 수강 신청을 받아 실제로 운영할 학교 교육과정을 확정하게 된다. 이때, 수강 신청 대상 과목들은 학생의 수요조사 결과를 토대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강 신청에 따라 대부분의 과목들이 운영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강 학생이 적어 폐강되는 과목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수요조사 결과가 교육과정에 편성할 과목을 결정하는 데 활용된다면, 학생들의 수강 신청 결과는 실제 운영할 교육과정의 과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다수의 학교에서는 수강 신청 결과를 토대로 실제 운영할 학교 교육과정의 개설 과목을 확정할 때 임의적으로 판단하기보다 일정 수강 신청 인원을 선택 과목의 개설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었으며, 이를 학교 규정에 명시해놓음으로써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선택 과목 개설의 기준으로서 학생 인원수는 학교마다 달랐는데, 학교 규모와 교사 인원 등을 고려하여 3명 이상, 6명 이상, 10명 이상, 13명 이상, 15명 이상 등으로 설정하고 있었으며, 이와 같이 학교가 자체적으로 설정한 과목 개설의 기준 학생 수보다 더욱 많은 학생들이 수강 신청했을 경우 해당 과목을 개설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선택 과목의 개설 기준을 마련을 했는데요. ߢ14명 이상 30명 이하의 학생이 수강신청 했을 경우에 개설을 해주자.ߣ 이렇게 얘기가 되어서, (선택 과목 개설 기준을 수강 신청 학생) 최소 15명과 최대 30명으로 설정해 놓았죠. [H교사]
면담조사에 참여한 학교들의 경우 대부분 수요조사와 수강 신청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학생의 의견을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상황 상 “아이들이 원하는 과목을 다 개설해줄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학생의 요구와 학교의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여 모종의 균형점을 찾고 있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논의되었다. 예컨대, 수강 신청 결과를 토대로 개설 과목을 확정할 때 특정 교과 교사들의 담당 과목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을 고려하여, 수강 신청 학생 수와 교사별 담당 과목 수 간의 모종의 ߢ조정ߣ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작년 같은 경우 우리 학교의 선택 과목 개설 기준 인원이 8명이었고, 올해는 개설 인원 기준이 6명이었어요. 개설 인원 기준이 그렇게 나온 데에는 (교사의 담당 과목 수에 따른 조정 때문이에요). 우리 학교의 경우 선생님들의 평균 담당 과목 수가 세 과목이에요. 그러니까 세 과목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되는 걸로 전체 교직원협의회에서 합의가 되었어요. [D교사]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의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 결과를 토대로 개설 과목이 확정되어 교육과정이 운영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학생은 단순히 교육과정 의사 결정 시 참고할 수 있는 자원이라기보다는 교육과정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학교의 상황을 고려하여 학생의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 결과를 그대로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기보다 학교 차원의 조정 과정이 일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은 학교 교육과정 개발의 주요 참여자지만 실제 교육과정은 학생과 교사가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 양상을 분석한 결과, 교육과정 의사 결정의 중요한 ߢ자원ߣ으로 고려되거나, 학교 교육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과정 개발의 ߢ참여자ߣ로서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으나, 일부 사례에서 학생은 학교 교육과정의 변화를 촉구하는 ߢ촉진자ߣ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생의 수요 및 과목 선택 결과가 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학교의 여건과 상황에 따라 학생들의 요구와 선택을 일부 조정하여 학교 교육과정이 편성·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곧, 현실적인 학교의 여건에 따라 학생의 요구를 모두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생의 요구는 일정 부분 선택적으로 학교 교육과정에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의 수요조사와 수강 신청 결과를 최대한 수용하기 위한 대안적 방안들을 모색함으로써 학교 교육과정의 변화까지 시도하고 있어 주목되었다. 곧,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의 수요가 있더라도 여건 상 학교 교육과정에 편성하기 어려운 과목이 있을 경우, 최소 졸업 이수 단위를 증배하면서까지 소인수 과목이나 공동교육과정 등을 통해 학생이 희망하는 학습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A교사의 학교에서는 학급을 더욱 많이 개설하거나 교사의 담당 수업 시수가 늘어나더라도 최소 교과 이수 단위(180단위)를 초과하여 방과 후에 소인수 과목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읍면지역의 소규모 학교인 F교사의 학교에서는 학생의 수요를 학교 교육과정에 모두 반영하여 개설이 어렵기 때문에 수강 학생이 3명 이상인 경우 과목을 개설하고 있었으나 수강 신청 학생이 그 이하인 경우에도 최대한 공동교육과정에 참여하도록 하여 선택 과목에 대한 학생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공동교육과정이나 소인수 과목을 개설·운영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특정한 과목을 개설해달라는 의견을 직접적으로 학교 측에 제공하는 등 학생이 주도적으로 학교 교육과정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한 첫 해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아서, 두 번째 해에는 본인들이 ߢ이 과목을 열어 주세요.ߣ라는 요청을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로봇 기초」라는 과목을 수강했던 학생이 다음 해에 주변 학교의 자기 친구들을 모아서 오히려 저한테 ߢ선생님, 「로봇 융합」 과목을 (공동교육과정으로) 열어 주세요.ߣ 이렇게 얘기를 해서 그 과목을 개설했던 경우도 있었어요. [H교사]
이와 같이 학생의 요구를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일부 연구학교에서는 최소 졸업 이수 단위를 증배하여 소인수 과목이나 공동교육과정으로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학생들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경우 이를 정규 교육과정의 과목으로 편성하는 방식으로 교육과정의 변화를 시도하는 사례들도 있어 주목되었다. 이 경우 방과 후에 개설·운영하였던 소인수 과목이나 공동교육과정 과목을 정규 수업 시간 내의 교육과정에 편성한 다음, 해당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정규 교사를 배치하거나 강사를 채용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의 학습 기회를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제공하고 있었다.
「화학 실험」, 「생명과학 실험」, 「프로그래밍」은 저희가 소인수 과목으로 방과 후에 180단위(최소 이수 단위)를 초과해서 열어줬는데, 「프로그래밍」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이 과목을 180단위 내로 끌고 와서 (정규 교육과정 과목으로) 개설했어요. 그래서 정보 선생님이 새로 오셨죠. [A교사]
우리학교는 일단 기존의 (정규) 교육과정의 편제표 안에 들어 있는 선택 과목을 늘리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서 원래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운영) 첫 해에는 기존 과목은 그대로 두고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을 많이 개설했거든요. 그렇게 운영하다가 보니까 학생들의 지속적인 수요가 있는 과목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심리학」이나 「교육학」, 「프로그래밍」, 이런 과목들에 대한 학생들의 지속적인 요구가 있어서, 그 과목들을 (정규 교육과정의) 편제표 안에 넣었어요. [H교사]
일부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과목 개설 요구를 교육과정에 반영할 때, 주어진 학교 환경과 여건을 고려하여 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공동교육과정 및 소인수 과목과 같이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새로운 방법으로 개설하거나, 해당 과목에 대한 학생의 수요가 증가할 경우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의 변화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학생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같은 노력은 기존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과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으로 주목해 볼 수 있다. 곧, 교사가 교육과정 개발의 주체이거나 또는 교사가 주축이 되고 학생은 부분적으로 개입하는 것에서 나아가 학생의 역할을 과목 개설의 ߢ주체ߣ이자 교육과정 변화의 ߢ촉진자ߣ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의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을 분석한 결과, 학생의 참여는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러한 학생의 참여는 교육과정 관련 의사결정의 주요 ߢ자원ߣ이나, 교육과정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ߢ참여자ߣ, 혹은 학교 교육과정의 변화를 도모하게 만드는 ߢ촉진자ߣ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면담조사 참여자들은 학생의 필요와 요구가 학교 교육과정에 긴밀하게 반영되면서, 수업의 질이 향상되고, 학생에 대한 존중감이 증대되었으며, 무기력했던 학생들이 수업 및 학교생활에 의미 있는 변화를 보이는 등의 성과가 나타났다고 논의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학교 교육과정 개발에 학생의 참여가 더욱 많아지면서 몇 가지 우려되는 점도 함께 제기하였다. 이 절에서는 교사들이 제기한 우려들을 중심으로,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 참여로 인한 쟁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면담조사 참여자들은 학교 교육과정 개발에 학생의 요구와 과목 선택 결과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교육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과목의 개설을 요구하거나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적극적·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의 학업을 설계해나가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학생이 자신의 적성이나 진로를 탐색하고 이를 토대로 과목을 선택하도록 돕고 있다. 그러나 면담조사 분석 결과, 일부 학생들은 개설 과목 수요조사나 수강신청을 할 때 자신의 진로 및 적성에 따라 신중하게 과목을 선택하기보다 단순한 흥미나, 쉽게 이수할 수 있는 과목, 상대평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과목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과목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학업에 대한 의지도 많이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본인의 진로진학에 대한 기초가 정립이 안 되어 있어요. 그냥 과목명으로 “이건 접근하기가 쉽겠다” 그런 과목들을 선택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략) 진로보다는 흥미. 거기에 초점을 둔 과목 선택이 우려가 되더라고요. [F교사]
학생들이 많으면 등급 잘 나올 것 같은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 과목으로 많이 몰리고. 자기의 적성보다는 대입과 더 연관을 시키는 거죠, 대입과 연관하다 보니까 학점이 잘 나올 것 같은, 등급이 잘 나올 것 같은 과목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요. (중략) 아직까지 진로가 과목 선택권에 크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덜 드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이 좀 애석해요. [I장학사]
학생이 진로 의식이 명확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의 요구나 과목 선택 결과를 중심으로 학교 교육과정이 편성․운영된다고 할 때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개설 과목이 확정되는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교사들은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목소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적성을 탐색하고 이를 고려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실제로 학생들은 자신의 과목 선택 역량을 키우기 위해 진로·진학 지도를 강화해주길 원하거나 과목 이수와 관련하여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길 요구하는 것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중요한 건 얼마나 이 아이한테 그것의 필요성, 중요성, 진로에 대해서 제대로 안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에요. 충분한 정보가 제공된 상태에서 그런 것들이 주어졌을 때는 아이들은 대개 학습 능력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적합한 과목을) 고민을 하며 선택을 하는 것 같아요. [E장학사]
아이들한테 설문조사를 받아오면 여전히 아이들의 가장 큰 불만은 진로 진학 지도가 부족하다. 그 다음에 과목 이수와 관련해서 충분한 정보를 달라, 이 불만이 많거든요. [A교사]
이러한 문제에 기인하여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학생의 진로․학업 설계를 돕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로 탐색 지원 및 과목 선택 안내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예컨대, H교사의 고등학교에서는 수요조사 결과를 토대로 과목을 개설하고, 수강 신청을 하기 전에 교육과정 박람회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교육과정 박람회를 통해 해당 과목이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교수․학습 및 평가가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하여 학생의 과목 선택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다수의 면담조사 참여 교사들은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생의 요구나 과목 선택 결과를 토대로 학교 교육과정이 편성․운영될 때,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선택 과목이 확정되어 교육과정이 운영되지 않도록 우선적으로 학생의 진로․학업 설계 및 과목 선택 역량을 신장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고교학점제는 학교 교육과정에 학생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는 학생 수요조사 및 수강신청 등을 통해 학생의 과목 개설 요구를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않던 학교 교육과정의 변화를 시도하는 등 학생의 목소리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면담조사 참여자들은 학생의 요구를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할 때, 개별 학생의 특성에 따라 학생의 목소리 크기에 차이가 있지 않는지에 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논의하였다. 우선 교사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개설하는 과목에 관심을 가지거나 자신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상당 수의 학생들이 학교 교육과정 개발에 ߢ수동적ߣ으로 임하기 때문에 학생 참여가 실제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국가 교육과정에 제시된 과목을 모두 개방하여 학생의 수요조사를 실시하여도 학생이 요구하는 과목은 한정적이거나 다양하지 않은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필요나 뭔가를 요구하진 않아요. 학생들이 되게 수동적이에요. [G교사]
개설 희망 과목에 대한 수요조사를 실시할 때, 아이들한테 선생님들이 개설한 과목 외에 원하는 과목에 대한 수요도 받아요. 그런 과목들에 대한 수요를 체계적으로 받기 위해 (학생들에게) 정보도 주기는 하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생각보다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선생님들이 (교육과정 편제표에) 깔아주는 것 외에 원하는 것들이 한정적이고, (예상했던 만큼) 그렇게 다양하게 많게 나오지는 않는 상황이에요. [B교사]
이와 같이 학생이 학교 교육과정 개발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는 상황은 기존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이 담당한 역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동안 학생이 학교 교육과정 개발의 ߢ주요 참여자ߣ의 위치에 있기보다 교육과정의 ߢ수혜자ߣ나 ߢ소비자ߣ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학교에 제안하는 경험이 부족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이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 학생들이 소극적으로 반응할 때, 개별 학생의 특성에 따라 과목 개설에 대한 요구의 적극성이나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되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논의되기도 하였다. 개별 학생의 특성 중에서도 특히 학업성취에 따른 목소리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진로 의식이 분명하거나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의 경우 자신의 진로와 관련하여 학습하고 싶은 과목이나 대학 입시를 위해 필요한 과목의 개설을 학교에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으로 논의되었다. 예컨대, 과학중점학교를 운영하는 H교사 고등학교의 경우, ߢ로봇기초ߣ, ߢ로봇제작ߣ, ߢ응용 프로그램ߣ 등의 과목을 개설해달라는 요구가 과학중점반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학교는 그에 따라 해당 과목들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의 경우, 학교에서 개설하는 과목에 대한 관심이 적거나 과목 개설에 대한 요구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학생들은 과목 개설에 대해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따라 “그러한 학생의 목소리가 (학교 교육과정에) 잘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으로도 논의되었다.
약간의 무기력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죠. 그 아이들은 사실 (과목 개설에 대해)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아요. 대부분 교육과정이나 평가에 대해 목소리 내는 아이들은 (성적이) 중상위권 이상의 아이들이더라고요. 솔직히 그 친구들은(하위권 학생들)은 (교육과정 개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C교사]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성적이) 하위권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경우 적극적으로 과목 개설을 학교에 요청하는 친구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해주어야 따라가는 아이들이에요. (교육과정에 대한) 목소리가 작은 아이들이요. 지금까지 계속 학교에서 목소리가 작아왔던 아이들이라서, 그 아이들의 목소리가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 잘 반영되지 않는 부분이 아쉬워요. [D교사]
교사들은 이 같은 학업성취 수준에 따른 과목 개설에 대한 학생들 간에 목소리 차이의 원인으로 누적된 불평등 경험, 학습된 무기력, 이로 인한 자신감의 차이 등을 꼽고 있었다. 즉, 고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오랫동안 누적되어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인해 학교 교육과정 개발에의 참여 기회가 학생들에게 주어졌고, 이는 유의미한 과목 선택으로 이어지는 데에 한계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개별 학생의 특성을 고려하여 모든 학생들의 의견이 학교 교육과정에 고루 반영될 수 있도록 더욱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학생의 요구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이 편성․운영되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목소리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면담조사에서는 이러한 과정에서 교사의 개입은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게 제기되었다. 곧, 면담조사 참여자들은 다수의 학생들이 요구한다고 하여 해당 과목들을 모두 개설해주어야 하는지, 흥미나 적성 위주의 과목이 개설됨에 따라 기초 학력 신장에 어려움이 생기지는 않을지, 학생들이 요구하는 과목이 과연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개설할 수 있는 성격의 과목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와 같은 고민들은 특히 학업성취도가 낮거나 학교 적응이 어려운 학생의 과목 선택 경향과 관련하여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사들은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이 흥미나 적성에 따른 과목의 개설을 요구할 때, 이들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해 해당 과목들을 학교 교육과정에 개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과목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경계를 나타내었다. 곧, 학생의 흥미․적성에 따른 과목 개설 요구를 모두 수용하다 보면 학교 교육과정이 “취미 삼아 해도 되는 과목”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특성화 고등학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직업 관련 과목을 개설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생들이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따라 바리스타, 사진, 연극과 같은 과목을 개설해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교사들은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가 어려운 과목을 “회피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공부를 좀 덜 하는 아이들도 존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진로 선택 과목에 이런 (성격의) 과목들을 (학교 교육과정에) 끌고 와서 개설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학생들 입에서 ߢ그 과목은 3학년 2학기 정도에 하거나, 취미 삼아 배워도 되는 것을 굳이 (선택) 과목으로 (개설)해야 돼요?ߣ 이런 얘기도 나온다는 거예요. [I장학사]
ߢ바리스타ߣ 과목, ߢ사진ߣ 과목, ߢ연극ߣ 과목 이런 것들을 학생들이 선택하는데, 그런데 사실 그 아이들이 그런 과목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려운) 과목들을 회피해서 선택한 것이라는 거예요. (중략) (교사로서) 그 아이들에게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과목은 따로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요. [D 교사]
교사들의 이러한 고민은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이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과목들을 선택하여 학습하도록 할 경우, 오히려 이들의 기초 학력 신장을 저해할 수 있으며 다른 학생들과의 학습 격차를 심화시키지는 않을지에 대한 우려로 확장되었다. 곧, 개별 학생들이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흥미와 적성 위주의 과목들을 더욱 많이 개설하는 것이 학생들을 위해 옳은 것인지, 기초적인 학력이나 인문학적 소양에 대한 과목을 교육과정에 편성하여 이들의 참여를 독려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일부 학교에서는 교사가 과목 개설 과정에 ߢ개입ߣ함으로써 이 같은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B교사가 속한 학교의 경우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에게도 영어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당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ߢ관광 영어ߣ 과목을 별도로 개설하였으며, C교사의 학교에서는 교양 교과로서 ߢ프로그래밍ߣ 과목을 개설하면서 코딩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배울 수 있는 과목도 함께 개설하여 학생의 능력에 따른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사례들은 학생들의 요구만을 반영한 선택 과목 개설 과정에서 놓칠 수 있는 학생들의 필요나 학습 수준 등을 교사가 ߢ개입ߣ하여 조정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성적)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과목들은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그렇고 저희 학교도 많이 개설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적) 하위권 학생들을 위해서는 정말 흥미 위주의 대안적 교육과정 말고 이 학생들의 학력을 높여줄 수 있는 과목을 개설해주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ߢ기본 영어ߣ, ߢ기본 수학ߣ을 개설을 할 수는 있는데, 기본적으로 (성적 하위권) 애들이 (이런 과목들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중략) 어떤 과목의 경우, 아이들한테 자기네들이 느끼기에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잖아요. 그래서 좀 걱정이 들긴 해요. [B교사]
교사의 개입은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을 위한 과목 개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교사들은 과목을 개설하고 선택하는 것을 학생에게만 맡길 경우, 기초학력이 저하되거나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 고교학점제가 도입되어 학생이 교육과정의 참여자이나 변화 촉진자로서의 역할이 커질 때, 교사의 개입이 어느 정도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학생이 요구하는 과목을 반영하여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해당 과목의 성격이 고등학교에 적합한 과목인지, 그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쉽거나 흥미 위주의 과목을 선택할 경우 학생의 균형적인 성장과 기초 소양의 발달을 저해하지는 않는지 교사들의 고민과 세심한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V. 요약 및 제언
최근 미래교육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함께 학생의 행위주체성을 강조하는 고교학점제 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그간 선택형 교육과정에서 학생에게 교과목 선택권을 제한적으로 부여했던 것과 달리 고교학점제에서는 학생의 수요조사와 수강 신청 결과를 기반으로 하여 학교 교육과정이 개발되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학생의 역할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고교학점제 시행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양상과 의미를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쟁점을 탐색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수행되었다.
분석 결과, 교사들은 기존과 같이 학생을 중요한 ߢ교육과정 개발의 자원ߣ으로 고려하여 학생의 수요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기도 하였으나, 학생 수요조사 및 수강 신청의 결과를 바탕으로 학교 교육과정의 개설 과목을 확정함으로써 학생을 중요한 ߢ교육과정 개발의 참여자ߣ로 고려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교사들은 학생의 요구를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위한 대안적인 방법들을 함께 모색하게 되는 상황을 언급하며 학생이 ߢ교육과정 변화의 촉진자ߣ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학생의 요구와 의견을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자신의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교육과정 변화를 요구하는 학생 간 목소리에 차이가 있는지, 학생의 의견을 교육과정에 반영할 때 교사의 개입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쟁점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서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의미에 대한 관점도 변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ߢ학생ߣ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당위적으로 강조되어왔으나, 실제 학생의 요구나 목소리를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이전과 달리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와 목소리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곧, 학생을 대상으로 개설 희망 과목에 대한 수요조사나 수강 신청 결과에 근거하여 학교 교육과정이 개발․운영되기 때문에, 고교학점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될 경우 학생은 학교 교육과정의 소비자 및 수혜자가 아닌, 교육과정 개발의 중요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학생을 중요한 개발 주체로 고려하는 접근이 요구되며, 이에 대한 학교의 준비와 대응이 필요하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생을 학교 교육과정 개발의 중요한 주체로서 고려할 경우, 학생의 요구와 관련한 세부 쟁점을 면밀하게 파악하며, 각 쟁점별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때, 본 연구 결과를 통해 도출된 쟁점은 향후 본격적으로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 데 있어 정책적으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을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본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적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과목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학생들의 진로 역량 및 과목 선택 역량을 함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요구된다. 아울러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를 수렴할 때, 학생들 간에 학교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요구하는 ߢ목소리ߣ에 차이가 있는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에 반영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많은 학생들의 요구를 묵과하지는 않는지 반성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학생의 의견을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해당 과목이 고등학교에 개설되기에 적합한 성격의 과목인지, 학생들이 왜 그 과목의 개설을 요구하고 있는지, 흥미 위주의 과목을 개설할 때 학생들의 기초 학력이나 기초 소양 함양에 어려움은 없는지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세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고교학점제가 도입되어 학생이 학교 교육과정 개발의 중요한 주체로 더욱 주목받는다고 하더라도, 학교 교사의 합리적이고 반성적인 논의와 적절한 개입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본 연구에서는 고교학점제의 전면 실행을 앞둔 상황에서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 학생 참여가 더욱 유의미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원 방안이 마련되어야 함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고교학점제 도입과 함께 학생의 진로․학업 설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고교학점제에서 학생의 교육과정 참여가 더욱 유의미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생의 요구나 과목 선택이 신중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학생이 진로․학업 설계 역량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개별 학생의 특성에 따라 이러한 역량과 목소리에 차이가 있지 않는지 검토하며, 개별 학생의 진로 인식 및 진로 결정 수준에 따른 맞춤형 진로․학업 설계 지도가 세밀하게 동반될 필요가 있다. 학생이 학교 교육과정의 주요 참여자와 변화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학생 스스로 진로․학업을 설계할 수 있는 행위주체자로 성장하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둘째,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단위학교에서 학생의 수요조사 및 과목 선택 결과를 중심으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교사들이 참고할 수 있는 안내서 등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 면담 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학생의 요구와 필요를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학생 참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학교의 여건이나 교사의 교육적 판단 또한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논의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교사의 혼란과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한 지원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실제 운영 사례들을 토대로 교사들이 참고할 수 있는 안내서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현재 교육부에서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서 참고할 수 있는 운영 안내서를 매년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는데, 학생의 교육과정 참여 방법과 이와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쟁점이나 우수 사례 등을 더욱 보완하여 일반 학교에서도 참고할 수 있도록 안내할 필요가 있다. 이때 표준화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보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학생의 참여를 활성화하는 방안과 그 가운데 고민해야 하는 사항, 이에 대한 사례 등을 안내함으로써 단위학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집단적 논의가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학생의 요구를 학교 교육과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단위학교의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학생의 요구를 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과목을 개설하거나 교사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특히 농어촌에 소재한 학교나 소규모 학교의 경우 인적․물적 인프라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학생의 의견을 수용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에 학생의 참여를 강조하는 것과 함께 단위학교에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하여 학교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교․강사 인력풀을 이용하거나 순회교사를 활용하여 졸업 최소 이수 학점 내의 정규 교육과정 과목으로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온․오프라인 공동교육과정으로 개설할 수 있도록 돕는 등 단위학교에서 학생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고교학점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에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교사와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담당 장학사들의 목소리에 근거하여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의미와 쟁점을 살펴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본 연구가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의 학생 참여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학생의 경험과 의견을 수렴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후속 연구에서는 학생들의 경험과 목소리에 근거하여 학교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학생 참여의 의미와 경험, 그 과정에서의 고민과 갈등 등을 세밀하게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