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사람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를 아는 것과 그 안 바를 자신의 삶의 장면에서 실제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행(行)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대 사상가인 주자와 양명도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그 결과 지(知)와 행(行)에 관해 사람들의 삶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귀한 사상을 남겨 두었다. 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는 검정 체제로 발간되고 있다. 2019년 현재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입각한 교과서가 5종, 2학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입각한 교과서가 역시 5종이다. 총 10종의 교과서가 2019년 현재 대 사상가들의 삶의 발자취와 사상의 흔적을 학생들에게 소개해주며, 학생들의 삶에 지혜를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자와 양명의 ‘지와 행’에 관한 사상은 청소년들의 삶에도 더 없이 중요한 부분이므로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이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확성이다. 정확하게 주자와 양명의 사상을 연구하여 기술하고 있는 교과서가 있는 반면에, 학생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게 기술된 교과서들도 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는 그 주된 독자가 고등학생들이다. 그러므로 고등학생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교과서의 경우 많은 학생들에게 부정확한 지식이 전달될 가능성이 높아 기술된 내용에 대한 재검토와 수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주자와 양명의 저술을 토대로 그들의 지와 행에 관한 입장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2019년 현재 고등학생들이 보고 있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의 정확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혹시 학생들에게 부정확한 내용을 전해주는 교과서가 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수정되어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 좀 더 정확하고 바른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살찌우고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를 희망한다.
Ⅱ. 주자(朱子)의 ‘지(知)와 행(行)’에 관한 입장
이굉조1)가 기록한 “주자어류”2) ‘제9(第九)권(卷) 학삼(學三) 논지행(論知行) 1조목’에서 주자는 지(知)와 행(行)에 관한 저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앎과 행함은 항상 서로를 의지하니, 마치 눈은 발이 없으면 가지 못하고 발은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2)3) 지와 행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하여, 서로를 기다리고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와 행 중 지만 있어도 불완전하고, 행만 있어도 온전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는 행이 있을 때 지의 역할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행 역시 지가 있어야지만 행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문자4)는 “주자어류” ‘제9권 2조목’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알기는 했지만 미처 행하지 못했다면 앎이 아직 얕은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몸소 체험해 보고 나면, 앎이 더욱 밝아져 예전 의미와는 다르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2)5) 앎이 진정 깊이가 있고 밝아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려면 그것을 실천하여 체험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요덕명 역시 ‘제9권 16조목’에서 주자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경우는 단지 행하기만 했지, 지혜롭게 되는 일단의 공부가 없었다”(여정덕 편, 허탁, 이요성, 이승준 역주, 2001, p. 149)6)며 “함양과 궁리는 두 가지 공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애지 않아야 하니,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다”(여정덕 편, 허탁, 이요성, 이승준 역주, 2001, p. 149)7)고 한 주자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행함’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앎’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와 행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지행상수(知行相須)의 입장은 “주자어류” ‘제9권 4조목’의 정단몽8)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앎을 이루는 것’과 ‘힘써 행하는 것’에 대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공부해서는 안 된다. 한 쪽에 치우치면 곧 다른 한 쪽에 병폐가 생긴다. 예를 들어, 정자9)는 “함양은 반드시 경敬으로 해야 하며, 학문을 증진시키는 것은 앎을 이루는 것에 달려 있다”고 했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3)10)
지와 행의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둘을 함께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주자는 “주자어류” ‘제103권 39조목’에서 “남헌은 ‘행하게 되면 앎이 더욱 밝아지고, 앎이 이미 밝아졌으면 더욱 더 잘 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어떻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도리는 진실로 이와 같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지와 행을 병행해서 나아가야 한다.”11)라고 답하여 지행병진(知行竝進)을 강조하였다.
“주자어류” ‘제14권 169조목’에서도 지행병도(知行竝到) 즉 지와 행의 공부가 함께 이르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와 행의 공부는 모름지기 함께 이르는 것이다. 앎이 점점 밝아질수록 곧 실행하는 것이 더욱 돈독해지게 되고, 실행이 점점 돈독해질수록 또한 앎이 더욱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양쪽 발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면, 점차 다닐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한 쪽이 약해서 다른 쪽만 내딛는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12)
정인재는 “주자문집” 45 ‘答遊誠之’의 “궁리와 함양은 마땅히 아울러 진행해야 한다”13)를 토대로 주자가 “여기서 앎을 위한 궁리와 행위를 위한 함양은 나란히 나아가야[竝進] 한다는 지행병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정인재, 2016, p. 188)라고 해석하였다.
항상 함께 있으면서 서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서로의 필수 조건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지와 행도 순서는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자어류” ‘제9권 1조목’에는 “순서를 논하면 앎이 먼저”(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2)14)라고 하여 선후를 따지면 먼저 알고 그 앎을 따라 행함이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제9권 4조목’에서도 정이천의 말을 예로 들어 “순서를 논하면 앎을 이루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3)15)며 지와 행을 순서에 따라 구분하면 선치지(先致知)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진문위가 기록한 ‘제9권 29조목’에서도 “반드시 먼저 지혜롭게 되고, 그 뒤에 함양해야 한다.”(여정덕 편, 허탁, 이요성, 이승준 역주, 2001, p. 157)16)고 하여 치지(致知)와 함양(涵養)의 선후에 대해 선치지후함양(先致知後涵養)의 차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진순이 기록한 ‘9권 30조목’에서도 “이치를 궁구하는 것과, 올바름을 쌓아 가는 것은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400)17)라는 요경(堯卿)의 질문에 주자는, 사실 이 선후는 분명한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면서도(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400)18)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먼저이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400)19)라고 하여 선궁리(先窮理)를 답으로 제시하였다.
양도부가 기록한 ‘9권 31조목’에서는 진순보다 더 분명하게 선궁리(先窮理)를 제시하고 있다. “온갖 일은 모두 이치를 궁구한 후에 분명해진다. 일에 순서가 없고 이치에 밝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을 붙잡아 지킨다 해도 공허할 뿐이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p. 400-401)20)
요덕명도 ‘9권 32조목’에서 양도부처럼 먼저 아는 것을 강조한 주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마치 혈전을 치르듯이 일단 절실하게 이해하고 난 다음에 함양해 나가야 한다….내가 지금 비록 정좌靜坐를 하고 있어도, 도리를 원래 알고 있다. 아직 알지 못했다면 무엇을 함양하겠는가?”(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401)21) 그래서 “오로지 몸소 실천하는 것만 터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 또한 어리석은 것이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401)22)라며 행하기 전의 앎의 중요성을 뚜렷하게 제시하였다.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하는 주자의 입장은 “주자어류”만이 아니라 “주자대전”23)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자대전”의 권42에 실려 있는, 오회숙에게 답하는 아홉 번째 편지에서 주자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원리를 일반적으로 논하여 한 가지 일에 나아가서 관찰해 보면, 아는 것이 먼저이고 행하는 것이 뒤가 되는 것이 확실하니 그것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주자사상연구회 역, 2000, p. 297)24)라고 하여 앎과 행함의 순서를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주자의 지와 행의 순서는 선지후행이지만, 이러한 순서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덕명25)이 기록한 ‘9권 6조목’에서 “반드시 먼저 알고 난 다음에 행해야 합니까?”(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4)26)라는 왕덕보의 질문에 주자는 “아직 이치에 밝지 않다고 해서 전혀 (마음을) 붙잡아 지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4)27)라며, 증자를 예로 들었다.
“근사록”28) ‘제2권 학문의 길[위학(爲學)편]’ 제6조에서 주자와 여조겸29)은 이천(伊川) 선생의 말을 소개한다.
도달할 곳을 알고서 그곳에 도달하는 것이 ‘致知’이다. 즉, 도달할 곳을 알게 된 다음에 그곳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는 것이 선행되므로 일의 幾微를 알 수 있다….성취해야 할 것을 알고서 이를 성취하는 것이 ‘力行’이다. 이미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를 알면 힘써 추진하여 이를 성취해야 한다.(주자, 여조겸 편, 이범학 역주, 2017, p. 79)30)
“주자어류”와 “주자대전”에서 주자가 강조한 먼저 알고 이를 바탕으로 행하는 지와 행의 관계가 이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선지(先知)하고 역행(力行)하게 됨을 보이고 있다.
‘위학편’ 제55조 역시 이천(伊川) 선생의 말을 통해 선지(先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알면 반드시 좋아하고, 좋아하면 반드시 찾으며, 찾으면 반드시 얻는다. 옛사람의 학문은 종신의 일이었다. 과연 급하고 어려울 때라도 반드시 여기에 뜻을 둔다면 어찌 얻지 못할 도리가 있겠는가.”(주희, 여조겸 편저, 이광호 역주, 2017, p. 247)31)
자신의 것으로 도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도리에 대해 알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제3권 지식의 탐구[치지(致知)편]’에도 이어진다. 제8조에서 역시 이천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하고 있다.
학자는 힘써 노력해야 하지만 모름지기 알아야 행할 수 있다. 만약 알지 못한다면, 이는 요임금을 얼핏 보고 그의 행동을 배우기만 하는 것일 뿐이다….앎을 이루지 못하고서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면, 이는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애써서 억지로 행하는 자가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오직 이치를 밝게 밝히기만 하면 저절로 이치에 따르는 것을 즐기게 된다. 성은 본래 선하므로 이치에 따라 행하는 것은 이치에 순종하는 일이니 본래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일에 임하자 곧 안배하려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한다.(주희, 여조겸 편저, 이광호 역주, 2017, pp. 338-339)32)
행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한다는 주자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주장이다. 알지 못하고 행하기만 하려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그 행함이 금방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행함이 어려운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천 선생의 명쾌한 표현이 지와 행에 관한 주자의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제11조의 역량(力量)의 부족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앎을 이루어야 한다. 지식이 분명해지면 역량도 저절로 향상된다.”(주희, 여조겸 편저, 이광호 역주, 2017, p. 345)33)는 이천 선생의 답변을 소개하며 선지(先知), 선치지(先致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주자는 지와 행의 비중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자어류” ‘제9권 1조목’에는 “중요성을 논하면 행함이 중요하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2)34)라고 하여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분명히 하였다. ‘제9권 4조목’에서도 정이천의 말을 예로 들어 “중요성을 논하면 힘써 행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여정덕 편, 이주행 외 역, 2001, p. 393)35)라고 하여 중역행(重力行), 행중지경(行重知輕)의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Ⅲ. 양명(陽明)의 ‘지(知)와 행(行)’에 관한 입장
양명은 “전습록”의 ‘5조목’에서 지와 행의 관계가 합일의 관계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내가 지금 ‘앎과 행위가 합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다. 이것은 또 내가 근거
없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앎과 행위의 본체가 원래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근본 취지를 이해한다면 (앎과 행위를) 두 가지라고 말해도 무방하니, 사실상은 하나이다.(왕양명, 2007, p. 91)36)
그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지행합일의 근거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양명은 “전습록” ‘132조목’의 ‘고동교에게 답하는 글[答顧東橋書]’에서 지행이 병진함을 주장하였다. 양명은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을 받았다.
보내온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려주신 것처럼 앎과 행위는 함께 나아가고, 전후로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곧 『중용』의 “덕성을 높이고 학문에 종사한다”는 공부로서, 서로 기르고 서로 분발시켜서 안과 밖, 근본과 말단을 하나로 관통하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공부의 순서에는 선후의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밥인 줄 알고서야, 먹고, 탕인 줄 알고서야 마시며, 옷인 줄 알고서야 입고, 길인 줄 알고서야 가니, 아직 이 사물[物]을 보지 못했는데 먼저 이 일[事]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왕양명, 2007, pp. 360-361)38)
이 편지에서는 자신은 선지후행을 주장하면서도 양명이 자신에게 ‘앎과 행위가 함께 나아간다’는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알려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양명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며 역시 지행의 병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대가) 이미 “서로 기르고 서로 분발시켜서 안[內]과 밖[外], 근본[本]과 말단[末]을 하나로 관통한다”고 말한 것은 앎과 행위가 함께 나아간다는 학설이므로 다시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 또 “공부의 순서에는 선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스스로 모순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밥인 줄 알고서야 먹는다’ 등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고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그대가 근래에 들은 것에 막히고 가져서 스스로 살피지 않을 따름이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은 뒤에야 밥인 줄 안다. 먹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의향[意]이며, 바로 행위의 시작이다. 음식의 맛이 좋은지 나쁜지는 반드시 입에 넣은 뒤에야 안다. 어떻게 입에 넣지도 않고 음식 맛이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알 수 있겠는가?(왕양명, 2007, pp. 361-362)39)
지행병진(知行竝進)이 옳고, 선지후행은 옳지 않음을 밥을 먹는 것을 예로 들어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다. 지행병진에 대한 양명의 확신이 드러나 있다. 양명은 이 지행병진을 자신의 ‘지와 행’에 관한 핵심 주장인 ‘지행합일’과 연결시켜 주장하고 있다. “앎과 행위가 합일하여 함께 나아간다는 사실은 역시 전혀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왕양명, 2007, p. 362)40) 그래서 양명의 ‘지와 행’에 관한 입장은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을 합한 ‘지행합일병진(知行合一並進)’이라고 할 수 있다. ‘지행병진’은 양명의 ‘지행합일’과 함께 ‘지와 행’에 관한 그의 핵심 사상인 것이다.
“전습록”의 ‘133조목’에서도 양명의 이 ‘지행합일병진’의 학설은 계속된다.
앎이 진실하고 독실한 곳이 바로 행위이며, 행위가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살피는 곳이 바로 앎이다. 앎과 행위의 공부는 본래 떨어질 수 없다. 다만 후세의 학자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하여 앎과 행위의 본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합일병진의 학설이 있게 되었다.(왕양명, 2007, p. 364)41)
양명의 지행병진에 관한 주장은 “전습록”의 ‘136조목’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생각건대 공부를 나누어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지만, 그 일을 합해서 말하면 하나일 따름이다. 내가 (주장하는) 마음과 이치가 합일하는 본체, 앎과 행위가 함께 진행하는 공부가 후세의 학설과 다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왕양명, 2007, p. 382)42)
양명은 자신이 강조하는 공부가 ‘앎과 행위가 함께 진행’하는 ‘지행병진’의 공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의 내용에 바로 이어 양명은 선지후행의 태도를 비판하며 다시 지행병진의 학설을 거듭 강조한다.
지금 그대는 단지 배우고 묻고 사색하고 변별하여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만을 거론하면서 독실하게 행하는[篤行] 것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배우고 묻고 사색하고 변별하는 것만을 앎[知]으로 여겨서 이치를 궁구할 때는 어떤 행위[行]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찌 행하지 않고도 배우는 것이 있겠는가? 어찌 행하지 않고도 마침내 이치를 궁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그런 까닭에 행하지 않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행하지 않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행하지 않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앎과 행위가 합일하고 함께 진행하여 두 가지 일로 나눌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왕양명, 2007, pp. 382-383)43)
행이 없다면 지가 아니라며 지와 행의 합일과 함께 병진을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인재, 한정길은 양명의 “전습록”에 대한 해설에서, 지행합일병진 사상이 “중용”에 대한 주자학적 해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주자학의 ‘지와 행의 분리’를 비판한 주장이라고 평가한다. 양명의 지와 행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입장이 ‘앎과 행위의 합일병진’이라는 것이다.
『중용』의 이른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獨行44)에 대한 고동교의 주자학적 해석을 비판하고, 심心과 리理의 합일 및 앎과 행위의 합일병진合一並進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출하고 있다. 주자학에서는 박학, 심문, 신사, 명변을 앎으로, 독행을 행위로 구분하여 지知와 행行을 분리시킨다. 이 점에 대해 양명은 학문사변이 모두 행위라고 여겨서 앎과 행위의 합일병진을 주장한다. 양명은 학學의 개념 안에 지와 행을 함께 포함시킨다. 학문사변은 학學이면서 행行이다. 독행만이 행行은 아니다.(왕양명, 2007, p. 387)
진래(陳來)는 “양명철학”에서 양명이 본래 지행병진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역설한다. 지행병진은 양명과 주자의 지와 행에 관한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래는 양명의 지행합일설은 지행병진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지는 행의 주의이고 행은 지의 공부이다”라는 명제는 주희의 “지와 행은 항상 서로 보완적이어야 하니, 마치 눈은 발이 없으면 다닐 수 없고 발은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라는 주장45)과 그 내용이 같다. 이 점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사실 왕수인은 본래 “지와 행은 나란히 나아가는 것이어서, 앞뒤를 분별해서는 안 된다”46)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본체’의 합일은 바로 ‘공부’의 병진竝進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나란히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송명 리학과 일치하게 된다. 예컨대 주희는 비록 지식이 선행하고 실천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천이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중시하면서 지와 행이 서로 보완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지행 공부는 반드시 동시에 이르러야 하고”(知行工夫須著竝到), “지와 행은 반드시 나란히 발전해야 한다”(知與行須齊頭做)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왕수인의 지행합일설은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진래, 2009, pp. 173-174)
주자가 지행병진을 주장했고 양명은 지행합일설을 통해 주자의 지행병진에 동의하고, 그 지행병진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양명이 지행의 병진, 공부의 병진을 주장했다고 해석하였다.
이상훈은 양명의 지행병진의 입장을 즉지즉행(卽知卽行)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良知天理(心)의 측면에서 본다면, 양지천리는 私欲에 의한 가림이나 방해됨이 없는, 純粹한 至善體이므로 知와 行은 자연히 一體가 되어(本心良知에는 知와 同時에 行이 있게 되는 것이다: 卽知卽行, 知行竝進).(이상훈, 1997, p. 15)
이상훈은 양명이 “‘心卽理’說에 입각하여 ‘卽知卽行’의 知行合一(知行竝進)說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본심양지에는 지와 함께 행이 있기에 지와 행은 일체이고, 병진한다는 것이다.(이상훈, 1997, p. 6)
조현규는 왕양명의 지행합일설을 정리하며 “앎과 행함은 함께 나아간다. 즉 지행병진한다는 것이다.”(조현규, 2006, p. 340)라며 지행합일설이 지행병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은 주자와 양명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은 주자와 양명의 지와 행에 관한 입장을 구분하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행병진설은 두 사상가가 유학자로서 공유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황갑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자 지행론의 기본 골간은 먼저 ‘지’가 이루어지고 나중에 ‘행’이 이루어진다는 선지후행이다. 이것 외에 진지락행과 지경행중 및 지행병진설이 있지만, 이는 주자만의 지행론이 아니라 모든 유자들이 긍정할 수 있는 지행론의 일반적 주장이다.(황갑연, 2018, p. 220)
장성모도 주자와 양명의 지행설을 “각각 ‘先知後行知行竝進說’과 ‘知行合一竝進說’로 요약”(장성모, 1993, p. 49)하며, 지행에 관한 “顧東橋의 질문에 대해서 陽明은 顧東橋가 말한 知行竝進說만큼은 옳다고 말한다”(장성모, 1993, p. 61)라며 선지후행설과 달리 지행병진설은 주자와 양명의 공통점임을 강조하였다.
IV. 내용의 정확도가 높은 “윤리와 사상” 교과서
미래엔 교과서는 주자와 양명의 ‘지와 행’에 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먼저 주자에 대해서는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먼저 알아야 그에 맞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하였다.”(정창우 외, 2019a, p. 44)라고 하여 주자의 지행에 관한 핵심 입장인 ‘선지후행’을 소개하고, 보충 단락에서는 주자의 전반적인 지행관을 기술하고 있다.
앎과 행동이 항상 서로 따르는 것은 마치 눈이 발 없이 다닐 수 없고, 발이 눈 없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후(先後)를 따지면 앎이 앞서고, 경중(輕重)을 따지면 실천이 중요하다.(정창우 외, 2019a, p. 44)
주자의 지행상수(知行相須), 선지후행(先知後行), 행중지경(行重知輕) 등이 모두 기술되어 있다. 정확한 내용이다.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서도 양명이 선지후행을 비판하며 지행합일을 주장하였음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성리학의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비판하면서 지행합일을 주장하였다. 왕수인은 “지(知)는 행(行)의 시작이고, 행(行)은 지(知)의 완성이다.”라고 하여 인식으로서의 지와 실천으로서의 행은 별개가 아니라 본래 하나라고 보았다. 즉 지(知)는 이미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행위는 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정창우 외, 2019a, p. 45)
금성 교과서에서는 주자의 지행론에 관한 기술은 없고, 양명만 주자와 비교하여 기술하고 있다. “주자학자들이 지식과 행위의 관계에서 지식을 우선시했던 경향을 비판하고,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식과 행위는 본래 하나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야기하였다.”(김선욱, 외, 2019, p. 51) 주자학의 선지후행을 비판하며 지행합일을 주장한 양명의 입장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천재교육 교과서에서는 지행상수(知行相須), 선지후행(先知後行), 행중지경(行重知輕) 등의 주자의 지행론이 함께 담겨 있는 “주자어류”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주자의 ‘선지후행’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소개하였다.
지(知)와 행(行)은 항상 서로 의존한다. 마치 눈이 있어도 발이 없으면 다닐 수 없고, 발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후를 논하면 지가 우선이고, 경중을 논하면 행이 더 중요하다. -주희, 『주자어류』-
주희는 먼저 올바른 지식을 갖추어야 참된 실천을 할 수 있다고[先知後行] 여겨 사물의 이치 탐구를 우선시한다.(변순용 외, 2019, p. 40)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의 ‘지행합일설’을 기술하고 있다.
양명학은 앎과 행동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知行合一] 강조한다. 왕수인은 “앎은 행동의 시작이고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라고 하며 앎과 행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양명학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왕수인은 지와 행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선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도 아직 행하지는 않았다고 여겨 그 생각을 억누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행합일설에 따르면, 선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나쁜 행동의 시작이므로 그러한 생각조차 그쳐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선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그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천해야 한다. 즉 양명학은 생각부터 행동의 시작으로 여기는 지행합일설을 통해 도덕 법칙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 생각을 참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주체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변순용 외, 2019, p. 42)
이렇게 양명의 지행합일설에 대해 그가 지행합일을 강조한 까닭까지 자세하게 소개한 후 보충 자료에서도 양명의 지행합일에 관한 주장을 기술하고 있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아직 참으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변순용 외, 2019, p. 42) 오류 없는 정확한 내용이다.
Ⅴ. 내용의 정확도가 낮은 “윤리와 사상” 교과서
천재교육 교과서는 주자와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비시켜 기록하고 있다.
주희가 “알과 실천은 서로 영향을 주어 함께 발전해 나간다.”라는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주장한 것과 달리, 왕수인은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이다.”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하였다. 그가 제시한 지행합일은, 앎과 실천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합일되어 있으며, 애초부터 지와 행은 서로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식을 확충하고 도덕적 실천을 함께 행할 것을 주장한 주희와 다른 점이다.(박찬구 외, 2019, p. 53)
여기에서 천재교육 교과서는 “주희가 지행병진을 주장한 것과 달리, 왕수인은 지행합일을 강조하였다.”라고 하여 ‘양명의 지행합일이 지행병진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며, 양명은 지행병진을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학생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행병진설’은 양명 또한 지행론의 핵심 사상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양명은 분명 ‘앎과 행위가 함께 진행하는’ 지행병진의 공부를 강조하였다.(왕양명, 2007, p. 382)47)
지학사 교과서는 주희의 지행론에 대해 ‘지행병진’을 소개하고 있다.
수양에서 터득한 지식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며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앎과 실천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박병기 외, 2019, p. 52)
그리고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지행합일’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참된 앎은 이미 그 속에 행함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앎은 곧 실천의 시작이고, 실천을 통해 앎이 완성된다.’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박병기 외, 2019, p. 53) 이렇게 주자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선지후행’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이 ‘지행병진’만 기술하고,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지행합일’을 기술한 이후, 주자와 양명의 지행론을 비교하고 있다.
성리학에서 ‘지식의 확충과 이것에 대한 실천을 함께할 것[知行竝進]’을 강조한 점과 양명학에서 ‘앎과 실천은 본래 하나[知行合一]’라고 주장한 것은 그 의미와 주안점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박병기 외, 2019, p. 53)
이 교과서에서는 천재교육 교과서처럼 지행병진과 지행합일을 완전 대조시키지는 않았지만, 주자에 대해서는 지행병진만, 양명은 지행합일만 소개한 후, 이 지행병진과 지행합일을 비교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지행병진은 주자만의 입장이고, 양명은 지행병진을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할 여지를 많이 두고 있다는 단점이 있다. 교과서는 청소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기에 그들의 이해 수준을 충분히 고려하여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 역시 지행합일설을 소개하고 있다.
왕수인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양지(良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치양지(致良知)]을 강조하면서, 선한 행위를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지행합일(知行合一)]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즉,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이라 하여, 알면 반드시 행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박효종 외, 2019, p. 46)
그리고 보조단의 ‘요점 정리’ 코너를 이용해 성리학과 양명학의 지행론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성리학은 지행병진, 양명학은 지행합일로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박효종 외, 2019, p. 47)
이러한 기술은 지학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지행병진은 성리학에만 해당되고, 양명은 지행병진을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학생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과서를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성리학은 지행상수(知行相須), 선지후행, 지행병진, 행중지경(行重知輕)으로, 양명학은 지행합일, 지행병진으로 기술하여야 학생들의 이해를 도모하기에 적절할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주희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지행병진만 소개하고 있다.
궁구하여 터득한 지식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며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앎과 실천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황인표 외, 2019, p. 42)
양명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지행합일설을 소개하였다. “그는 참된 앎은 이미 그 속에 행함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앎은 곧 실천의 시작이고, 실천은 곧 앎의 완성이다.’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황인표 외, 2019, p. 43)
이렇게 주자와 양명의 지행론에 관한 입장을 지행병진과 지행합일로 각각 소개한 후 두 입장을 비교하고 있다.
성리학에서 지식의 확충과 이것에 대한 실천을 함께 할 것[知行竝進]을 강조한 점과 양명학에서 앎과 실천은 본래 하나[知行合一]라고 주장한 것은 그 의미와 주안점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도덕 법칙을 궁구하고 그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황인표 외, 2019, p. 44)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지학사 교과서의 서술과 거의 비슷하다. 지학사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성리학에서 ‘지식의 확충과 이것에 대한 실천을 함께할 것[知行竝進]’을 강조한 점과 양명학에서 ‘앎과 실천은 본래 하나[知行合一]’라고 주장한 것은 그 의미와 주안점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박병기 외, 2019, p. 53)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지학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교학사 교과서도 성리학은 지행병진, 양명학은 지행합일로 소개한 후, 지행병진의 성리학과 지행합일의 양명학을 비교함으로써 학생들이 양명은 지행병진의 입장이 아닌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명의 지행합일은 주자의 지행병진을 비판하며 나온 학설이 아니라 선지후행에 대응되는 사상이며, 지행병진은 주자와 양명의 공통점이기에 주자는 ‘선지후행과 지행병진’을, 양명은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을 서술해 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보조단의 ‘아, 그렇구나!’ 코너에서도 “주희는 궁구하여 터득한 지식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며 ( )을 주장하였다.”(황인표 외, 2019, p. 42), “왕수인은 ‘앎은 곧 실천의 시작이고, 실천은 곧 앎의 완성이다.’라는 ( )을 주장하였다.”(황인표 외, 2019, p. 44)라고 제시하여 각각 ‘지행병진’과 ‘지행합일’을 정답으로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지행병진’은 주희의 지행론으로, 양명은 ‘지행병진이 아닌 지행합일’로 학생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역시 개선의 여지가 있다.
미래엔 교과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 교과서는 정확하게 기록되었는데, 2015 개정 교육과정 교과서는 학생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주희의 지행론에 대해서는 “주희는 도덕 법칙의 탐구와 더불어 도덕 실천이 중요함을 주장하면서, 지(知)와 행(行)이 서로 영향을 주어 함께 발전해 나아간다는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제시하였다.”(정창우 외, 2019b, p. 45)라고 하여 지행병진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 비교되는 왕수인에 대해서는 지행합일설을 소개하였다.(정창우 외, 2019b, p. 47)
그리고 ‘단원 마무리’ 코너에서 ‘주희’와 ‘왕수인’의 지행론을 비교하여 “( ): 지(知)와 행(行)은 서로 영향을 주어 함께 발전해 나간다는 것”, “( ): 앎으로의 지(知)와 실천으로서의 행(行)은 별개가 아니라는 것”(정창우 외, 2019b, p. 48)으로 제시하여 주자는 ‘지행병진’, 양명은 ‘지행합일’을 정답으로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주자는 지행병진, 양명은 ‘지행병진이 아닌 지행합일’의 입장인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역시 개선의 여지가 있다. 주자는 지행상수(知行相須), 선지후행, 지행병진, 행중지경(行重知輕)을, 양명은 지행합일, 지행병진을 강조한 것으로 수정하는 것이 학생들의 정확한 이해를 돕는 길이 될 것이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주자의 지행론으로는 ‘선지후행’과 ‘지행병진’을(류지한 외, 2019, p. 40), 양명의 지행론으로는 ‘지행합일’을 제시하고, 보조단의 ‘콕! 개념 확인’ 코너에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지행론을 비교하여 성리학은 “선지후행, 지행병진”을 주고, 이와 “대응하는 개념”으로 양명학은 정답 빈칸에 ‘지행합일’을 적도록 요구(류지한 외, 2019, p. 41)하였다. 역시 학생들이 지행병진은 성리학에만 해당되고, 양명학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어 개선의 여지가 있다. 성리학은 지행상수(知行相須), 선지후행, 지행병진, 행중지경(行重知輕)으로, 양명학은 지행합일, 지행병진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개념 확인이 될 것이다.
Ⅵ. 결론
지금까지 주자와 양명의 지와 행에 관한 입장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2019년 현재 고등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10여 종의 “윤리와 사상” 교과서의 내용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양명이 지행합일과 함께 지행병진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과서에서 지행병진을 주자의 지행론으로만 소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지행병진과 연장선상에 있는 양명의 지행합일을, 지행병진과 대조하여 기술한 교과서도 있음을 보았다. 이로 인해 학교 현장의 많은 학생들이 양명은 지행병진과는 관련이 없고, 지행병진은 오직 주자의 입장으로만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학생들에게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할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교과서를 바탕으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부정확한 지식을 습득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2019년에 수학능력시험을 볼 고3 학생들이 보고 있는 천재교육 교과서에 “주희가 지행병진(知行竝進)을 주장한 것과 달리, 왕수인은 지행합일을 강조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학생들이 그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볼 때, 수능 문제의 정확성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능 문제가 가장 기본적으로 교과서를 바탕으로 출제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교과서 내용에 대한 재검토와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정 사항이 학교 현장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다.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양명의 ‘지행합일’과 ‘지행병진’을 합한 ‘지행합일병진(知行合一並進)’ 사상은 주자의 지행병진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선지후행(先知後行)에 대한 비판이었다. 정인재, 한정길은 “전습록”을 해설하며 “지행 관계에 대한 주자와 양명의 견해 차이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왕양명, 2007, p. 368)로 대변된다며, “주자의 선지후행설에 대한 양명의 비판은 ‘마음을 벗어나 이치를 구했기 때문에 지행을 둘로 나누었다’는 데 있다”(왕양명, 2007, p. 368)고 보았다. 정인재는 이 책에서 “양명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은 주자학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왕양명, 2007, p. 31)이라고 단언하였다.
김세정도 양명이 “주희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대응하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하였다”(장승구 외, 2006, p. 282), “주자의 ‘먼저 알고 나서 실천한다’고 하는 선지후행설을 비판하고 심리(心理) 일원적 체계에 근거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한다”(장승구 외, 2006, p. 287) 등 여러 부분에서 양명의 지행합일설이 주자의 선지후행설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야스다 지로도 양명이 지행합일설을 내세우는 까닭이 선지후행설의 병통 즉 평생토록 행동도, 알지도 못하게 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양명의 지행합일설이 선지후행설로 인한 악영향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요즘 사람은 앎과 행동을 두 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먼저 알고 난 다음에 행동할 수 있다고 여겨 우선 앎의 공부를 하고 그것을 통해 얻은 진정한 앎으로부터 행동의 공부로 나아가고자 한다고 양명은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생토록 행동하지 않을 뿐더러 평생토록 알지도 못하게 되므로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니며 유래도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지금 지행합일설을 내세우는 까닭은 그런 병통에 대한 약이라고 양명은 말한다.(야스다 지로, 2017, p. 185)
박연수 역시 양명의 지행합일설이 선지후행설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39세에 수양방법으로는 정좌(靜坐)를 주장하고, 주육(朱·陸)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반대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으며”(박연수, 2010, p. 39).
황갑연은 주자 이후 “주자의 후학들은 오로지 선지후행만에48) 집착하고, 앎이 진실하면 실천이 즐겁다는 진지락행眞知樂行에만 몰두하여 지행론에 관한 다른 이론을 간과하였다”(황갑연, 2018, p. 206)며 “양명의 지행합일론은 분명 주자의 선지후행론을 지적하면서 주장한 것”(황갑연, 2018, p. 207)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양명의 지행합일설을 주자의 ‘지행병진설에 대비 되는 학설’로 소개하고 있는 일부 교과서의 기술은 ‘선지후행설에 대비 되는 학설’로 수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로, 성적, 부모님과의 갈등, 교우 관계에서 오는 힘듦 등 우리 학생들의 삶을 어렵게 하는 현실의 많은 문제들이 있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는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당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 철학이 좀 더 정확하게 기술되어 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 사상가들의 정확한 사상을 익히고, 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좋은 통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과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