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고등학생들은 교과서를 통해 한 사상가의 진면목을 만나기도 하고, 스스로 공부해 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 받기도 한다. 학생들 중에는 다산의 핵심 사상을 교과서를 통해 처음 접하기도 한다.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이 한 사상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주요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과서의 서술이 잘못되어 있다면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잘못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 사상에 입각해 사고하고, 현실의 삶을 꾸려 나가는 데도 큰 지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과서 서술은 최대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는 미래엔, 천재교육, 금성출판사, 지학사, 교학사 등에서 5종이 발행되고 있다. 이 5종 교과서 모두 한국의 핵심 사상가로 다산을 지목하고 교과서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그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교과서에 소개된 다산의 사상 중 많은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인간의 욕구’에 관한 부분이다.
‘욕구’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다루는 대상이다. 학생들도 자신의 삶의 행복을 위해, 자아실현을 위해 혹은 도덕적인 삶과 연관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욕구’를 성찰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 삶에서 없을 수 없는 것이 이 욕구일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다산 자신도 이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그의 수많은 저술에서 욕구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다산의 사상을 소개하는 교과서에서는 좀 더 정확하게 그의 입장이 서술되어 학생들이 정확한 지식에 근거해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는 데 도움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다산의 욕구ㆍ욕망관을 그의 저술들을 통해 알아보고, 현재 교과서들이 이러한 그의 입장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Ⅱ. 다산의 저술에 드러난 ‘욕구ㆍ욕망관’
2018년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서술하고 있는 다산의 ‘욕구ㆍ욕망ㆍ욕심관’과 관련하여 ‘욕구’라는 표현은 미래엔(정창우 외, 2018, p. 63), 천재교육(박찬구 외, 2018, p. 64), 금성출판사 교과서(김선욱 외, 2018, p. 60)에서 사용하고, ‘욕망’은 지학사(박병기 외, 2018, p. 62), 금성출판사 교과서(김선욱 외, 2018, p. 60), ‘욕심’은 지학사 교과서(박병기 외, 2018, p. 62)에서 사용하였다. 교학사 교과서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해당하는 다산의 표현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욕(欲)’(2016b, p. 167; 1994, p. 132), ‘욕(慾)’(2008b, p. 141; 2016d, pp. 292~293), ‘인욕(人欲)’(1996, p. 352; 2016a, p. 85), ‘인욕(人慾)’(2016a, pp. 94~95), ‘인심(人心)’(2016f, p. 81), ‘심소욕(心所欲)’(2016b, p. 167), ‘인심지소욕(人心之所欲)’(2016b, p. 167), ‘사욕(私欲)’(2016d, pp. 284~285; 1994, p. 132), ‘사욕(私慾)’(1994, p. 132), ‘욕심(欲心)’(2016a, p. 553), ‘원욕(願欲)’(2016a, p. 553; 2011, p. 8)2), ‘기호지욕(嗜好之欲)’(2002, p. 622) 등이다. 다산은 이러한 표현들을 혼용하기도 하였다. ‘인욕(人欲)’을 ‘사욕(私欲)’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2016d, pp. 284~285), ‘원욕(願欲)’이 ‘욕심(欲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였다(2016a, p. 553).
다산은 「이발기발변」 에서 퇴계가 말한 “이(理)는 바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이며 ‘도심(道心)’이며 ‘천리지공(天理之公)’이요, 그가 말한 ‘기(氣)’는 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며 ‘인심(人心)’이며 ‘인욕지사(人欲之私)’이다”(1996, p. 352)라고 하여 인욕(人欲)을 천리의 공적인 것과는 대조되는 사사로운 것이라며 부정적으로 파악하였다.
다산은 『시경강의』 에서 ‘욕망[慾]’에 가리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여기에서의 욕망은 구체적으로는 색욕(色慾)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색을 좋아할 때는 욕망에 가렸기 때문에 여자가 덕을 상실했음을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2008b, p. 141)3).
다산은 『논어고금주』 의 「위정(爲政)」 에 대한 주(註)에서 일반사람들이 마음의 욕구[欲]를 따르면, 이것은 인심의 욕구[欲]를 따르는 것이며, 결국 악에 빠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기(禮記)』 의 말을 빌려 인간의 욕(欲)은 좇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2016b, p. 167)4). 「팔일(八佾)」 에 대한 주(註)에서는 “민생은 욕심이 있어 이를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사치해져서 법도를 잃는다”(2016b, p. 283)5)라고 하여 욕심[欲]을 예(禮)로써 절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인(里仁)」 에 대한 주(註)에서는, 인욕(人欲)에 깊이 빠져 행동하는 사람은 소인(小人), 도척(盜蹠), 짐승이 되고, 인욕과 대비되는 천명(天命)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군자, 순임금, 사람이 된다고 하며, 전자는 악, 후자는 선(善)으로 연결하였다(2016b, pp. 464~465)6). 그리고 이렇게 인욕에 깊이 빠진 사람은 도심(道心)이 없어지고 인심(人心)이 주인이 되며, 대체(大體)는 잃어버리고 소체(小體)가 왕성해진다고 하였다(2016b, p. 465).7) 「공야장(公冶長)」 에 대한 주(註)에서도, 인욕(人欲)을 천명(天命)과 대조되는 것으로 보고, 우리 마음 속에서 인욕은 천명과 싸우고 있다고 하며, 이 인욕을 이겨야하며, 이렇게 할 때 자신의 허물을 고칠 수 있다고 보았다(2016b, p. 603).8)
「자한(子罕)」 에 대한 주(註)에서는, 인간이 욕망[欲]하는 대상을 부귀와 안락으로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이러한 욕망이 탐심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타인을 해하기까지 하기에 결국 모든 악의 발생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2016c, p. 423).9)
「안연(顏淵)」 에 대한 주(註)에서는, 인간의 몸에는 대체와 소체가 있고, 마음에는 도심과 인심이 있는데, 도심으로 인심을 이겨야 함을 기술하고 있다(2016d, p. 289).10) 그리고 인간의 욕(慾)과 사욕(私欲) 그리고 인심(人心)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덧붙여 욕은 도(道)와 싸우고 있고, 사욕은 선한 본심과 원수이며, 인심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도심은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한 주자를 지지하고 있다. 「헌문(憲問)」 에 대한 주(註)에서는 욕(欲)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남에게 있는 것을 탐내는 것이 욕欲이다”(2016e, p. 19).11) 그리고 군자는 탐내지 않는다고 하여 군자가 욕을 이겨낸 성인임을 강조하고 있다(2016e, p. 19).12) ‘극벌원욕(克伐怨欲)’은 ‘악의 제거’로 해석하여 ‘욕(欲)’을 악으로 기술하였다(2016e, p. 19).13) 아울러 욕심을 좇으면 탐하게 된다고 보고, 욕심의 싹을 싸워 이겨내어 이것이 행해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해하고 있다(2016e, p. 21).14)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부분에서는, ‘이욕(利欲)’만 따르는 것을 소인이 되는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2016e, p. 43).15)
「위령공(衛靈公)」 에 대한 주(註)에서는 인심과 도심을 각기 좋아하는 것에 따라 대비시키고 있다. 도심이 덕(德)을 좋아하는 것에 반해 인심은 색(色)을 좋아한다고 보았다(2016e, p. 339).16)그리고 사욕을 끊는 것을 인(仁)으로 본 주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2016e, p. 397).17) 「양화(陽貨)」 에 대한 주(註)에서는 인심(人心)에 관한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먼저, 인심을 ‘형구의 모든 욕심[慾]’이라고 정의한다(2016f, p. 81).18)또 다른 편에서 주해했던 것처럼 인심과 도심을 대비시켜 설명하는 데 이번에는 발(發)하는 것의 차이를 중심으로 한다. 즉 도심은 ‘도의(道義)’를 따라 발한 마음으로, 인심은 ‘형질(形質)’을 따라 발한 마음이라고 한다(2016f, p. 107).19) 그리고 인심의 역할로 ‘재물을 탐내고, 부귀를 생각하며, 악을 따르게 함’을 제시하였다(2016f, p. 107).20) 아울러 인심과 도심을 대비하여 “도심이 주도해 나가면 선을 할 수 있게 되고, 인심이 하늘을 거스르게 되면 악을 할 수 있게 된다”(2016f, p. 107)21)고 보았다. 결국 인심과 형구는 인간을 ‘악에 빠지게 하는 구실’을 한다고 그 역할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2016f, p. 107).22)
다산은 『맹자요의』 의 「등문공 상(滕文公 上)」 에서 사욕(私慾)을 형기(形氣)와 연관지어 ‘형기의 사욕’이라 표현하며, 이것이 선은 하기 어렵고 악은 하기 쉽다고 주장한다(1994, p. 132).23) 「고자 상(告子 上)」 에서는 이 형기의 사욕이 양심을 없애고, 큰 악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다(1994, p. 335).24)
그리고 「등문공 상」 에서는 앞의 『논어고금주』 에서 인심과 도심을 대조시켜 인심의 악을 설명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심, 도심을 기호(嗜好), 성(性)과 연관하여 ‘인심의 기호로서의 성’, ‘도심의 기호로서의 성’을 언급하며, 인심의 기호는 ‘교만스럽고 지나친 성품’이므로 ‘절제’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994, pp. 132~133).25) 「고자 상」 에서는 인심과 도심을 기질(氣質), 도의(道義)와 연관시켰다. 인심은 기질이 발한 것, 도심은 도의가 발한 것인데, 기질의 성은 동물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성, 도의의 성은 인간만 지니고 있는 성이라는 것이다(1994, p. 318).26)
「등문공 상」 에서는 ‘욕심[慾]’을 ‘천명(天命)’과 대비시키기도 했는데, ‘악한 일을 저지를 경우’를 당했을 때 욕심은 그 악한 일을 하려고 하고, 천명은 이 욕심을 저지하려한다는 것이다(1994, p. 135).27) 연관하여 「고자 상」 에서는 인간의 욕심을 순선한 본성과 대비시켜, 순선한 본성은 형체가 없고 영명(靈明)한 대체(大體), 욕심은 형체가 있는 몸뚱이인 소체(小體)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며, 이러한 본성은 도심과 천명으로 연결되고, 욕심은 인심과 사욕으로 연결되어 결국 본성을 따르는 것은 선, 욕심을 따르는 것은 악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1994, p. 350).28) 아울러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의 ‘기(己)’를 ‘인욕(人欲)’으로 보아 ‘인욕의 극복’ 후에 인(仁)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1994, p. 353).29)
「진심 상(盡心上)」 에서는 욕(欲)을 의(義)와 대비시켜 인심과 도심의 싸움에서 욕이 이기면 악에 빠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인심에서 발하는 것이 사욕이므로 인심을 ‘극복, 제어’할 것을 강조한다(1994, p. 395).30) 「진심 하」 에서는 맹자가 가장 중요시한 것이 ‘도심의 보존’인데 이를 위해서는 ‘욕심이 적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1994, p. 439).31)
『대학강의』 에서는 “자신의 욕심을 좇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익을 탐하는 것에서 말미암으며 임금이 재량하여 법도를 따르게[絜矩] 하지 못한다”(2016a, p. 339)32)고 하여 자신의 욕심[欲]만을 좇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기술하였다.
『대학공의』 에서는 인욕(人欲)과 기품(氣稟)을 연관지으며 “주자가 말한 ‘구염(舊染)’이 기품과 인욕에 의해 오염된 것이니, 이른바 ‘최상의 지혜를 지닌 사람[上知]이라 해도 없을 수 없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2016a, p. 85).33)그리고 인욕(人慾)을 천리(天理)와 대조되는 것으로 보았다.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存天理遏人慾]”(2016a, pp. 94~95). 인욕을 천리와는 대조되는 것으로 보면서 천리는 보존하고 인욕은 막을 것을 강조하는 것은 성리학과 다산의 공통점이다.
『중용자잠』 에서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 데, 이 욕심을 좇아 충족시키려고 하면 방자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다고 하였다.34)여러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다산의 ‘인간 욕구와 욕망관’을 성리학과 대조하여 서술하고 있지만 『중용강의보』 에서 다산은 주자의 「대우모」주석에 관한 견해를 지지하며 자신의 욕구관을 주장하고 있다. 즉 주자의 “인심은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기 쉬워 공명정대하기 어려우므로 위태위태하다”는 주해를 받아들이며, 인심이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기 쉽다는 것은 인욕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부연하였다.35) 즉 다산은 ‘인심과 인욕 모두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기 쉽고 공명정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심경밀험』 의 제1장에서 “사람의 죄악은 대개 식색과 안일의 욕구에서 말미암”(2016a, p. 467)36)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욕을 천리와 대비하여 인욕은 ‘인심’, ‘그름’과 연결되고, 천리는 ‘도심’, ‘옳음’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2016a, p. 475).37) 특히, 욕구 중 ‘물욕(物欲)’에 대해 언급하며, 이 욕구가 ‘선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린다’고 하였다(2016a, p. 477).38) 제14장에서는 욕구와 다른 것의 ‘싸움’으로 표현하는 데, ‘욕(欲)’과 ‘의(義)’, ‘인욕(人欲)’과 ‘천리(天理)’를 대비시켜 싸우고 있다고 하였다(2016a, p. 515).39) 제27장에서는 욕망[욕(慾)]이 사람에 따라 ‘맑거나 탁한 차이’는 있겠지만, 욕심[욕(慾)]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은 똑같다고 하였다(2016a, p. 545).40) 제1장에서는 욕구가 본성을 ‘가린다[蔽]’고 했는데, 이 장에서는 ‘잃는다[失]’고 하였다.
제30장에는 뒤에서 다룰 욕구에 대한 긍정적 입장, 양면적 입장과 함께 그래도 ‘이록(利祿)의 욕망[욕(慾)]은 악’이라는 입장이 드러나 있다. 일단 맹자의 ‘마음을 기르기 위해 욕심을 줄여라’는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욕심을 ‘재물욕’으로 이해하기에 적어도 ‘물욕은 줄여야 한다’는 입장을 다산이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욕심이 없었으면 “악을 행할 수도 없었”(2016a, p. 553)41)다고 한 것이다.
다산은 문산 이재의(자는 여홍)에게 서신을 보내어 몸의 기호에 대해 주장하면서 욕망은 당연히 절제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포함시켰다. 다산은 『상서』 와 『예기』 의 ‘성(性)의 절제’라는 표현이 ‘욕망의 절제[절욕(節慾)]’를 의미한다고 보았으며(정약용ㆍ이재의, 1996, p. 148)42), 맹자가 말한 ‘성을 참는다’는 것도 ‘욕망을 참는다[인욕(忍慾)]’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정약용ㆍ이재의, 1996, p. 148).43)
주희는, 『서경』 「대우모」 의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김학주 역, 2009, p. 83)에 대해 해석하며 인심(人心)과 인욕(人欲)을 도심(道心), 천리(天理)와 대조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도심이 성명(性命)의 바른 것에서 근원하고, 천리(天理)가 공정함에 비해 인심과 인욕(人欲)은 사사로운 것이라고 하였다(정약용, 2002, p. 614).44) 다산은 주희의 이 해석을 적극 지지하며 “우리들의 성명(性命)의 공안(公案)으로서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백세(百世)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으리라”(2002, p. 614)45)라고까지 존중의 뜻을 표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이 형기를 가지고 있기에 식욕(食欲), 색욕(色欲), 안일(安逸)의 욕(欲)이 짐승과 같고, 이것이 인심의 위태로움이라고 하였다(2002, pp. 615~616).46) 주자가 말한 인욕(人欲)을 식욕, 색욕, 안일의 욕으로 구체화하였고, 주자가 사사롭다고 한 것을 이어받아 짐승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다산은 이 책에서도, 모든 인간의 마음이 인심 아니면 도심에서 나온다며 인심과 도심을 대조하여 인심은 사(私), 도심은 공(公), 그리고 이를 선악(善惡)에 배치하여 인심은 선, 도심은 악으로 판별된다고 보았다(2002, p. 621).47) 아울러 식욕과 색욕 등 구체적인 욕구의 부정적인 면을 기술하였다. 사람에게 있는 세(勢)를 설명하며, 식욕과 색욕은 안에서 유혹한다고 하며, 이로 인해 그 세(勢)는 악을 좇는 것이 쉽다고 하였다(2002, p. 626).48)
다산이 욕구, 욕망을 부정적으로 파악한 경우는, 욕구나 욕망을 인심(人心)으로 표현하며 도심(道心)과 대조하여 사용하였을 때이다. 이 때 인심은 사사로움과 악으로 흐르며, 도심은 공명정대함과 선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또 욕구나 욕망을 人欲 또는 人慾으로 표현할 때도 부정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는 천리(天理)나 천명(天命)과 대비시켜, 인심과 마찬가지로 사사로움, 그릇됨, 짐승의 특징으로 파악하였다. 욕구나 욕망을 私欲 또는 私慾으로 표현할 때도 부정적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이 때도 인심이나 인욕과 마찬가지로 악으로 흐르는 것으로서 양심(良心)과 대조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심경밀험』 의 제30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욕구, 욕망관과는 다른 입장이 나온다. 욕구, 욕망에 대한 긍정적 입장이 등장한다. 맹자의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2016a, p. 467)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욕심(欲心)이 없으면[무욕(無欲)] 선을 행할 수도 없고, 문장을 지을 수도 없고, 생산활동도 할 수 없다며 “다만 세상에 하나 버려진 물건”이 된다고 하였다(2016a, p. 553).49)적어도 욕심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영체(靈體: 마음) 안에는 본래 욕구[원욕(願欲)]의 단서가 있다고 보았다(2016a, p. 553).50) 여기에서 다산은 ‘원욕(願欲)’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뒤에 바로 “만약 이 욕심이 없다면 세상 만사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2016a, p. 553)51)고 하여 이 원욕이 바로 ‘욕심(欲心)’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도, 문장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욕심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이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경서에 대한 그의 강의나 주해에서의 ‘욕심이 악의 원인’, ‘욕심을 극복해야 한다’ 등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다산은 『목민심서』 에서 “백성의 원욕을 물어서 간곡하게 그 뜻을 이루어주어야 한다”53)라고 하여 원욕(願欲)을 ‘원하고 바라는 것’의 욕(欲)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도 백성의 욕구, 욕망을 물어서 그 뜻을 ‘이루어주라’고 했으니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산은 『논어고금주』 의 「옹야(雍也)」 에서 “허물을 고치려는 욕(欲)”과 “고치지 않으려는 욕(欲)”이 있다며 허물을 고치려는 욕구는 도심에 속하고, 고치지 않으려는 욕구는 인심에 속한다고 보았다(2016b, pp. 620~621).54)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욕구[欲]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심경밀험』 의 제30장에는 ‘욕심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욕심에 대한 긍정적 입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욕구를 양면적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드러난다. “이록에 천착”하는 물욕(物慾)은 악을 행하게 하고, “도의를 추구”하는 욕심은 선을 행하게 한다는 것이다(2016a, p. 553).55) 한 사람에게 욕구가 지극히 크면 그 욕구에 따라 죽어도 후회하지 않게 되는데, “탐욕스런 사람의 욕구”는 재물을 위해, “열사의 욕구”는 명예를 위해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2016a, p. 553).56)
다산은 『매씨서평』 에서 성(性)이 기호지욕(嗜好之欲)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천명지성(天命之性)이 모두 기호라고 하였다(2002, p. 622).57) 욕구에 천명지성으로서의 기호지욕이 있고, 기질지성으로서의 기호지욕도 있다는 것이다. “기질지성은 단것을 좋아하고 쓴것을 싫어하며 향기를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이며, 천명지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의(義)를 좋아하고 탐욕을 미워하는 것”(2002, p. 622)58)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천명지성이 선을 좋아하므로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하였다고 하였다(2002, p. 625).59) 이를 통해 볼 때 천명지성으로서의 기호의 욕구는 선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질지성으로서의 기호의 욕구는 신훈(新薰)이 될 수도 있고, 구염(舊染)60)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2002, p. 628).61)
다산은 「이발기발변」, 『시경강의』,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강의』, 『대학공의』, 『중용자잠』, 『중용강의보』, 『심경밀험』, 「답이여홍 7차 서신」, 『매씨서평』 등의 저술에서 욕구ㆍ욕망을 나타내는 ‘人欲’, ‘人慾’, ‘慾’, ‘欲’, ‘私欲’, ‘私慾’, ‘인심(人心)’, ‘인심지소욕(人心之所欲)’ 등을 사용할 때 부정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 욕구ㆍ욕망은 악으로 귀결되기에 절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천명(天命)을 좇는 삶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욕구ㆍ욕망을 부정적으로 많이 사용한 이유는, 그가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입장62)에서 도덕적 자기 완성을 근본으로 여겼는데, 수기(修己)를 망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았을 때 욕구ㆍ욕망이 바로 그 주범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2016a, p. 545).63) 욕구ㆍ욕망은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가리고,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욕구ㆍ욕망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심경밀험』, 『목민심서』 등에서 ‘욕심(欲心)’, ‘원욕(願欲)’ 등을 사용해 인간의 욕구ㆍ욕망을 표현할 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낫고, 있기에 선악의 도덕적 활동, 경제적 활동, 학문과 예술 활동 등을 할 수 있으며, 목민관은 백성들의 욕구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논어고금주』, 『심경밀험』, 『매씨서평』 등에서 ‘허물을 고치려는 욕(欲)’과 ‘고치지 않으려는 욕(欲)’, ‘이록(利祿)을 좇는 욕심(欲心)’과 ‘도의(道義)를 좇는 욕심’, ‘천명지성으로서의 기호지욕’과 ‘기질지성으로서의 기호지욕’ 등으로 표현할 때의 욕구ㆍ욕망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다산은 그의 여러 저술에서 인간의 욕구ㆍ욕망에 대해 그것이 악으로 가기 쉬운 사사로운 것이므로 절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고 모든 활동의 원동력으로 긍정하는 부분과 긍정ㆍ부정의 양면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Ⅲ.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 내용의 정확성 분석
다른 교과서들이 다산의 욕구ㆍ욕망관이 ‘긍정적이었다’고만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지학사 교과서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양면성을 제시했다는 점이 다른 교과서들에 비해 정확성이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욕망을 인간이 행동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면서 욕망의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동시에 마음속에서 도의(道義)에 따르려는 마음과 사사로운 욕심에 따르는 마음이 서로 갈등하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여기서 그는 삶에서 주체적 결단과 행동이 요구되는 인간 존재의 성격을 제시하고 있다.(박병기 외, 2018, p. 62)
지학사 교과서 서술의 아쉬운 점은, 욕구ㆍ욕망의 긍정적인 측면과 양면성은 서술하고 있지만 다산의 핵심 관점인 욕구ㆍ욕망의 절제에 관한 측면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욕구ㆍ욕망의 절제를 통해 천명(天命)과 천리(天理), 도심(道心)과 의(義) 그리고 영명(靈明)한 대체(大體)를 따라 사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한 다산의 목소리가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지면 더 좋을 것 같다. 다산은 육경사서(六經四書)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삶의 근본으로 여겼고, 수기(修己)를 위해서는 자신을 악으로 이끄는 욕구ㆍ욕망의 절제가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학사 교과서에서 정확성이 낮은 부분은 ‘도덕성의 후천성’에 관한 서술 부분이다.
그는 인간에게 도덕성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성리학의 입장은 옳지 못하며, 선을 행한 다음에 덕이 형성되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성이란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라고 주장하였다.(박병기 외, 2018, p. 62)
다산이 성리학의 입장 중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것은 ‘도덕성의 선천적 부여’가 아니다. 오히려 다산은 ‘도덕성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다산은 인간에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기호’로서의 선한 도덕성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맹자의 성선설이 정확하게 옳다는 입장이다. 『맹자요의』 에서 다산이 “이것이 인간의 성(性)이 선(善)하다는 명확한 증거이다”(1994, p. 130)64), “인간의 본성(本性)이 반드시 선을 행하는 것을 좋아함은”(1994, p. 131)65)이라고 한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도덕성’이 본성에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다산은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늘이 이 성(性)을 부여하”(1994, p. 131)66)였다고 한다. 도덕성의 ‘선천적 부여’를 확실하게 입증하는 대목이다. 또, 다산이 맹자가 “성(性)은 선하다”라고 한 것을 지지하며, 이 때의 성(性)을 “도심(道心)의 기호(嗜好)”라고 한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994, p. 133).67) ‘도심의 기호’는 분명 도덕성이며, 이 기호가 성(性)이기에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임을 보여준다. 『매씨서평』 의 “천명지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의(義)를 좋아하고 탐욕을 미워하는 것”(2002, p. 622)68)이라는 서술도 이를 확증해 준다. ‘선과 의를 좋아하는 천명지성’이야말로 선천적으로 부여된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성리학의 입장으로 비판한 것은 성(性)을 이(理)로 여기는 것과 본연지성(本然之性)에 관한 주장이었다.
성리가(性理家)들은 매양 성(性)을 이(理)라고 여긴다. 그래서 『집주』 에서 ‘인(人)과 물(物)이 생겨날 때 천지(天地)의 이(理)를 똑같이 얻어서 성(性)으로 하였다’라고 말하니,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다.(1994, p. 235)69)
그러므로 지학사 교과서의 도덕성에 관한 서술은 빠른 시간 안에 수정되어야 한다. 수정 시에는 다산이 ‘도덕성의 선천적 부여’를 인정했으며, 다산의 성리학 비판은 성(性)을 이(理)로 여긴 점이었으며,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는 ‘도덕성’이 아니라 ‘인의예지’임이 내용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명칭은 일을 행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한 뒤에 그것을 인(仁)이라고 하느니, 사람을 사랑하기 이전에는 인(仁)이라는 명칭이 성립되지 않는다. 나를 착하게 한 뒤에 이것을 의(義)라고 하느니, 나를 착하게 하기 전에는 의(義)라는 명칭이 성립되지 않는다. 손님과 주인이 절하고 읍한 뒤에 예(禮)의 명칭이 성립되고, 사물을 명료하게 분변한 뒤에 지(智)의 명칭이 성립되는 것이니, 어찌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네 알맹이가 복숭아와 살구의 씨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덩어리로 잠재해 있는 것이겠는가?(1994, p. 91)70)
금성 출판사 교과서에서 내용의 정확성이 낮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통 성리학자들이 대체로 이러한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을 부정하고 개인의 수양을 통해 그것을 절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과 달리, 정약용은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원동력으로 여겼다.(김선욱 외, 2018, p. 60)
다산이 삶의 원동력으로 여긴 것은 ‘욕심(欲心)’, ‘원욕(願欲)’이었지 ‘물질’이라는 구체적 대상에 대한 욕망이 아니었다.
우리 인간의 영체(靈體: 마음) 안에는 본래 욕구의 단서가 있다. 만약 이 욕심이 없다면….내가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마음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어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악을 행할 수도 없었으며, 문장을 지을 수도 없었고, 생산활동도 할 수 없었다.(2016a, p. 553)71)
다산은 그의 많은 저술에서 ‘물질적인 욕망’을 경계하고, 절제할 것을 강조하였다. 『논어고금주』 에서는 부귀에 대한 욕망이 탐심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타인을 해하기까지 하기에 결국 모든 악의 발생과 연관되어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2016c, p. 423).72)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부분에서는 ‘이욕(利欲)’만 따르는 것을 소인이 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다(2016e, p. 43)73) 인심을 ‘형구의 모든 욕심[慾]’이라고 정의한 후, 인심의 역할로 ‘재물을 탐냄’을 들고, 이것을 ‘악을 따르는 것’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2016f, p. 107).74) 『심경밀험』 제1장에서는, 욕구 중 ‘물욕(物欲)’에 대해 언급하며, 이 욕구가 ‘선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린다’고 하였다(2016a, p. 477).75) 선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리니 이 물욕 즉 물질적인 욕망을 부정적으로 파악했음이 분명하다. ‘물질적인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삶의 원동력으로 여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30장에서는, 맹자의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를 해석하며, 이 때의 욕심을 “이록(利祿)의 욕망” 즉 물질적인 욕망으로 보았다(2016a, p. 553).76) 물질적인 욕망을 줄여야 하고, 그렇게 할 때 마음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결코 물질적인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교과서 저자가 이렇게 서술한 데는, 앞에서 제시한 『심경밀험』 제30장의 “욕심이 없다면….생산활동도 할 수 없었다”는 부분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욕심’이 없으면 그 어떠한 인간의 활동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이지 ‘물질적 욕망’을 긍정한다는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교과서에는, 물질적인 욕망뿐 아니라 다산이 욕구ㆍ욕망에 대해 피력했던 많은 부정적인 입장들과 ‘욕구의 절제를 통한 도심(道心)을 따르는 삶’의 강조 등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런 부분을 반영한 수정보완이 필요하다.
미래엔 교과서에서 다산의 욕구ㆍ욕망관에 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사람에게 몸이 있는 한 욕구가 없을 수 없으며, 욕구가 없다면 그 실천의 결과인 선악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정창우 외, 2018, p. 63)
다산이 인간의 욕구를 긍정적으로 파악한 면만 기술해 놓고 있다. 그러나 다산의 저술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산이 인간의 욕구를 긍정적으로만 파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는 욕구가 도덕적인 삶에 방해가 된다며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욕구를 극복하고 천명(天命)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이 훨씬 많았다. 이 교과서도 이러한 다산의 욕구관을 반영하여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천재교육 교과서에서 욕구ㆍ욕망에 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인간의 감정에서 드러나는 욕구를 불순하게 여기는 성리학의 금욕적 수양론에서 벗어나, 인간의 욕구를 생존은 물론 도덕적인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박찬구 외, 2018, p. 64)
역시 긍정적인 욕구ㆍ욕망관만 기술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산은 욕구를 도덕적인 삶을 위해 극복하고 제거하고 없애버리라고 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욕구가 인간을 악에 빠지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교과서의 현재 서술은 이러한 다산의 입장을 담지 않아 학생들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소지를 많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역시 다산의 입장을 반영하여 수정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다산의 욕구ㆍ욕망관을 그의 저술들을 통해 살펴보고 이에 입각해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 관련 내용의 정확성을 검토해 보았다. 다산은 많은 부분에서 욕구ㆍ욕망의 절제를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물질적인 욕망, 성적 욕망, 안일함의 욕망에 빠져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며 악에 물드는 삶이 아니라 군자다운 삶, 선한 삶, 참 사람다운 삶을 지향할 것을 강조한 다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욕구ㆍ욕망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으로, 선과 악의 두 측면을 지닌 존재로도 이해하고 설명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2018년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지학사 교과서는 욕구에 대한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양면적인 성격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 타 교과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확성이 높았음을 확인하였다. 그에 비해 다른 교과서들은 다산의 ‘천명(天命)과 도심(道心)을 지향하는 삶을 위한 욕구의 절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다산이 욕구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어 다산의 정확한 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금성 출판사 교과서가 ‘물질적인 욕망’을 다산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원동력으로 여겼다”고 서술한 부분은 ‘재물에 대한 탐냄’, ‘물욕(物欲)’, ‘이록(利祿)의 욕망’ 등을 경계하고 절제할 것을 강조한 그의 입장과 배치(背馳)되는 부분이라 수정이 필요함을 확인하였다.
상대적으로 정확성이 높았지만 지학사 교과서의 ‘도덕성의 선천적 부여 비판’과 ‘도덕성의 후천적 습득’은 빠른 시간 안에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다산은 천명(天命)의 성(性)을 하늘로부터 선천적으로 부여 받았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영지의 기호를 선천적으로 부여 받아 인간의 성(性)은 선하다’라고 주장하는 그이기에 ‘도덕성의 선천성’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교과서 내용의 수정보완을 통한 좀 더 정확한 서술로 다산의 생각이 우리 학생들에게 풍성하고 정확하게 전해지고, 우리 학생들도 자신의 욕구를 지혜롭게 다룰 줄 아는 성숙한 한 사람의 인격으로 성장해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