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교과서

2018년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내용 중 ‘이황의 사단칠정의 선악관’ 서술의 정확성에 대한 교과서 비교 연구

문성호 1 , *
Seong-Ho Moon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안산동산고등학교 교사
1Teacher, Dongsan Christian High School
*제1저자 및 교신저자, lovinghan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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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Apr 02, 2018 ; Revised: May 03, 2018 ; Accepted: May 03, 2018

Published Online: May 31, 2018

요약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이황의 사단칠정 선악관’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수학능력시험에서도 여러 번 출제되었다. 그러나 관련된 교과서 내용은 그 중요성만큼 정확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018년 “윤리와 사상” 교과서는 5종류이다. 이황의 ‘칠정의 선악관’에 대해 이 중 두 교과서는 다른 세 교과서보다는 상대적으로 내용의 정확도가 높지만 나머지 세 교과서는 이황의 입장과는 다른 내용이 서술되어 있어 시급히 수정이 요청된다. 일부 교과서에는 이황이 자신의 입장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수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정하기 전의 견해가 실려 있기도 하였다. 이황의 ‘사단 선악관’도 마찬가지다. 이황의 사단칠정관을 대표하는 두 축인 ‘기대승과의 논변’과 이러한 논변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는 “성학십도” 중 전자만 서술하고, 이후 저술된 후자의 주장이 누락된 교과서가 대부분이었다. 이황의 사상에 있어 “성학십도”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 내용을 반영하여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ABSTRACT

Yi Hwang’s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Emotions has been dealt with importantly at the high school textbook of Ethics and Thoughts. The questions regarding the viewpoints of good and evil in Yi Hwang’s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Emotions have been taken many times at the government-sponsored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 In terms of the significance of the Neo-Confucian scholar’s thoughts on the issue, however, the actual contents of the idea are not explained as exactly as expected. There exist five different versions of Ethics and Thoughts textbooks printed for the 2018 academic year. Of the five, two present more precise contents compared with the three others. The three textbooks deal with the topics in a way different from the original positions of Yi Hwang, whose pen name is Toegye, and thus require immediate revisions. In some cases, the authors admitted their faults and revised the texts, but the printed textbooks didn’t reflect the changes. The same is true for Yi Hwang’s theory of good and evil in the thoughts of Four Beginnings. Most of the textbooks only introduced the famous “Four-Seven Debate” – which discussed the relationship between Mencius’s Four Beginnings (or four basic human feelings) and Seven Emotions – while ignoring The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聖學十圖) where Toegye raised the level of his Confucian debate with Gi Daeseung to a new height of intellectual sophistication. The “Four-Seven Debate” and The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 are two of the cardinal pillars of Yi Hwang’s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Emotions.

Keywords: 이황; 사단칠정; 윤리와사상; 교과서; 기대승; 퇴계; 사칠논쟁; 성학십도
Keywords: Yi Hwang; Toegy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Emotions

Ⅰ. 서론

정체성의 혼란과 사회적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소중한 지혜를 체득하여 현대 사회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성찰하고, 이를 도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교육과학기술부, 2012, p. 47)를 기르도록 하기 위해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윤리 사상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 중 한국 윤리 사상가로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고 있는 인물 중 한 분이 퇴계 이황이다(교육과학기술부, 2012, p. 51).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2018학년도 “윤리와 사상” 5종 교과서 모두 한 면 이상을 할애하여 이황의 사상을 다룰 만큼 그 비중은 상당하다. 이로 인해 교육과정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평가하는 수학능력시험에서도 거의 매년 이황의 사상이 출제되고 있다.1)

이처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황의 사상 중 모든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단칠정’에 관한 주장이다. 이황이 기대승과의 논쟁에서 전개한 사단칠정에 관한 사유와 그 논쟁의 결과를 반영하여 저술하고 왕에게 올린 “성학십도”에서의 사단칠정에 관한 치열한 고민은 학생들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기현은 이황의 사단칠정설이 “그의 도덕적 인간학의 중심 이론이요 동시에 실천 과제에 해당된다”(민족과 사상 연구회, 1992, p. 49)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임헌규도 “그것은 불굴의 탐구 정신으로 진리와 완성된 인격체(성인聖人)를 지향하는 내재적인 덕德의 실제적 현시로서, 고전적 지혜 사랑의 전형”(2014, p. 12)이라고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이황의 사단칠정에 대한 교과서 서술의 중요성은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직 이황의 저술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던 많은 학생들은 일차적으로 교과서의 내용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황의 사단칠정을 다루고 있는 5종의 교과서 중에는 사단칠정의 선악에 관한 이황의 입장을 그의 주장과는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곳들이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심지어 그의 사단칠정에 관한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기대승과의 논변’과 “성학십도”의 내용 중 이황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장을 수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의 입장을 서술하고 있는 교과서도 있었다.

또한 이황의 사단칠정에 관한 입장이 드러나는 ‘기대승과의 논변’과 그 논변의 결과를 반영하여 저술한 “성학십도” 중 전자의 내용만 서술하고, 후자의 입장은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퇴계의 사상을 온전하게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 조각만 알려주는 격이다. 말년까지 끝까지 탐구하고 공부하여 풍성하게 이룬 이황 사상의 진면목을 학생들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하는 처사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글은 먼저 이황이 사단칠정의 선악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기대승과의 논변’과 “성학십도”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5종 교과서에 서술된 이황의 사단칠정의 선악관에 대해 그 정확성 여부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II. 이황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선악관

1. 기대승과의 편지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가. “기명언 대승에게 드림[與奇明彦大升(己未)]”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이황은 1558년 그의 나이 58살에 32살의 기대승을 처음 만난다(김기현, 2000, p. 154). 그 다음 해 이황은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사단칠정에 관한 선악관을 밝힌다. 1559년 1월에 보낸 편지에서 주장한 사단과 칠정의 선악에 관한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사단의 발은 순수한 리이므로 불선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고 있으므로 선악이 있다”(윤사순, 2013, p. 124).2) 여기서 이황은 사단은 ‘불선함이 없고’, 칠정은 ‘선악이 있다’고 하였다.

나. “논변 제1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이황의 주장에 대해 기대승은 1559년 3월,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이것은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칠정은 성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354)3)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이황은 1559년 10월, 기대승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본격적으로 사단칠정에 관한 주장을 하였다(이황, 기대승, 2006, p. 601).

사단은 모두 선한 까닭에 맹자는 “네 가지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했고, “정이란 선하다 할 수 있다.” 했습니다.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한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발현된 뒤 절도에 맞은 다음에야 조화롭다고 하는 것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359)4)

이 편지에서 이황은 사단은 ‘모두 선하고’, 칠정은 ‘선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처음 기대승에게 보낸 ‘사단은 불선함이 없다[四端無不善]’는 표현을 ‘사단은 모두 다 선하다[四端皆善]’로, ‘칠정은 선악이 있다[七情有善惡]’는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七情善惡未定]’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다. “논변 제2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1560년 11월,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논변 제2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는 “제1서를 고친 글[改本]”, “논변 제2서”, “후론”으로 이루어져 있다(이황, 2010, pp. 229-272).

1)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1559년 10월에 이황이 보낸 “논변 제1서”를 받은 기대승은 1560년 8월, 다시 이황의 글을 12절로 나누어 반박하는 편지를 보낸다[高峯答退溪論四端七情書](이황, 기대승, 2014, pp. 46-81). 그 중 제6절에서 기대승은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七情善惡未定]’고 한 이황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7. 변론에서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한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발현된 뒤 절도에 맞은 다음에야) 조화롭다고 하는 것이다.”하셨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정자가 “기쁨ㆍ노여움ㆍ슬픔ㆍ즐거움이 발현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찌 원래부터 선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다면 가는 곳마다 선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본래 선한 것이고 칠정 역시 모두 선한 것입니다. 다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한 편에 치우쳐 악하게 되는 것일 뿐이니, 어찌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겠습니까?(이황, 기대승, 2006, p. 380)

여기서 기대승은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단과 마찬가지로 모두 선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승의 비판을 받은 이황은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이황, 2010, p. 229)을 보내는데 여기에서 칠정에 관한 중요한 수정을 하고 있다. 이 수정에는 ‘사단은 본래 선한 것이고 칠정 역시 모두 선한 것’이라는 기대승의 주장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즉, “논변 제1서”에서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 입장에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수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단은 모두 선한 까닭에 맹자는 “네 가지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했고, “정이란 선하다 할 수 있다.”했습니다. 칠정은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기 때문에 발현하여 절도에 맞아야만 조화롭다고 하고, 한 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은 이미 그 바름을 잃는 것입니다. “본래 선하지만…”이하는 지난번에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한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발현된 뒤 절도에 맞은 다음에야 조화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했습니다만 지금 고쳤습니다. (이황, 기대승, 2006, p. 402)5)

이황은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이전에 “논변 제1서”에서 칠정에 대해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善惡未定]’고 한 것을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는 정[本善易流於惡]’으로 수정하였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기대승에게 보낸 ‘칠정에 선악이 있다[七情有善惡]’와 두 번째 “논변 제1서”의 ‘칠정은 선악이 정해져 있지 않다[七情善惡未定]’에서 ‘칠정이 본래는 선하다[七情本善]’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논변 제1서”에 대해 조목 조목 반론을 펴며 설득에 나섰던 기대승의 ‘칠정 역시 모두 선한 것’이라는 주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황은 “논변 제1서”에 대해 비판을 가한 기대승의 반론을 듣고 일곱 부분을 고쳐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을 보냈다(이황, 기대승, 2006, pp. 399-405).

2) “논변 제2서”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이황은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을 앞면에 적어 보내면서 그 뒷면에 “제2서”를 이어서 기대승에게 보낸다(예문동양사상연구원, 윤사순, 2008, p. 282). 이 “제2서”에서 이황은 내용을 크게 다섯 조목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데 그 중 두 번째 조목은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제 말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황, 기대승, 2006, p. 407)이다. 즉, 기대승의 설명을 듣고 자신의 주장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견해를 수정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이황은 앞면의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 이미 잘못을 시인하고 수정한 칠정의 선악관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둘째,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제 말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

위의… 조항은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제 말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으로, 역시 이미 고쳤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p. 407-408)6)

‘칠정 선악 미정(未定)’이라는 자신의 “논변 제1서”의 견해가 옳지 않았음과 ‘본래는 선한 것으로 정해졌지만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本善易流於惡]’으로 수정하였음을 다시 한 번 더 밝힌 것이다.

그런데 “제2서”에서 이황이 기대승의 주장과 자신의 견해를 다섯 개의 조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 중 다섯 번째 조목은 “의견이 달라서 끝내 따를 수 없는 것에 관”(이황, 기대승, 2006, p. 419)한 내용이다. 이 조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황은, 아홉 개의 조항을 제시한다(이황, 기대승, 2006, pp. 410-411). 그 중 세 번째 조항으로, 기대승이 이황을 비판하며 주장한 “어떤 것은 언제나 선하다 하고 어떤 것은 선악이 있다고 하니, 사람들은 정情이 둘인가 하고 의심하거나 두 가지의 선善이 있다고 의심할까 두렵다”(이황, 기대승, 2006, p. 420)7)를 든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의견이 달라서 끝내 따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재반론을 편다. “황은 말합니다 : 순수한 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하고,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아닙니다”(이황, 기대승, 2006, pp. 420-421).8) ‘순수한 이’는 사단, ‘이와 기를 겸한 정’은 칠정이다.

처음 했던 주장을 다시금 펼치고 있는 것이다. “논변 제1서”를 보내기 전 이황은 기대승에게 처음으로 사단칠정의 선악관에 대해 언급하며 ‘四端之發, 純理故無不善; 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이라고 하였다. 그 후 “논변 제1서”를 보내고, “제1서를 고친 글[改本]”도 작성한 후, “논변 제2서”에서 이황은 다시 “純理故無不善, 兼氣故有善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이황은 칠정이 ‘유선악(有善惡)’하다고 했다가 “논변 제1서”에서는 ‘선악미정(善惡未定)’으로 고치고, 이에 대해 기대승이 “칠정도 본래는 모두 다 선하다. 다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한 편에 치우쳐 악하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자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해서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는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는 정[本善易流於惡]’이라고 수정하였지만 “논변 제2서”에서는 원래 본격적인 논변을 시작하기 전의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큰 차이점이 있다. 비록 유선악이지만 ‘본래는 선하다’는 관점이 들어갔다. ‘원래 선악’이 있기에 유선악하거나 ‘선악미정’이기에 유선악한 것이 아니라 ‘본래는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기에 유선악하다는 것이다. 즉, ‘본래는 선한 정이면서 유선악한 정’이 된 것이다. ‘선악이 있다’는 공통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는 선으로 정해져 있다’로의 큰 변화의 시각도 있다.

3) “후론(後論)”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기대승은 이황이 1559년 10월에 보낸 “논변 제1서”를 받은 후 이를 12절로 나누어 상세히 검토한 답변인 “고봉답퇴계 제2서”를 1560년 8월에 보냈다(이황, 기대승, 2006, p. 363). 이 답변에서 기대승은 사단에 관한 새로운 선악관을 피력한다.

무릇 사단의 정은 이에서 발현하여 언제나 선하다고 한 말은 본래 맹자가 가리키신 것을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넓게 정을 다루어 자세히 논한다면, 사단의 발현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니 진실로 모두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보통 사람들 가운데에는 미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미워하는 수가 있고 따지지 말아야 할 것을 따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이가 기 속에 있으면서 기를 타고 발현할 때에, 이는 약하고 기가 강하여 이가 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정이 흐를 즈음에 진실로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정은 늘 선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9) 또 어찌 사단은 선하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가 바로 학자들이 정밀히 살펴야 할 곳입니다. 만약 참과 거짓을 분간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의 욕심을 천리의 작용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생길 것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p. 391-392)

이 편지에서 기대승은 사단도 모두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사단의 발현에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황은 “논변 제2서”의 “후론”(이황, 2010, p. 255)에서 기대승의 주장을 반박하며 “사단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논의는, 비록 참신하다고는 하겠지만, 역시 맹자의 본뜻은 아닙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30)10)라며 일축한다. 이황은 사단이 “순수한 천리의 발현”(이황, 기대승, 2006, p. 430)11)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맹자의 뜻이 “성性이 본래 선하기 때문에 정 또한 선하다는 뜻을 드러낸 것일 따름”(이황, 기대승, 2006, p. 430)이라고 하였다.

사단에 대해 처음 기대승에게 보낸 “기명언 대승에게 드림[與奇明彦大升(己未)]”에서의 ‘무불선(無不善)’, “논변 제1서”에서의 ‘사단개선(四端皆善)’,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도 역시 ‘사단개선(四端皆善)’, “논변 제2서”에서의 ‘무불선(無不善)’의 입장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순수한 천리의 발현이기에 불선함이 없고, 모두 다 선하다는 주장이다.

라. “논변 제3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三書]”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이황의 “논변 제2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1560년 11월)]”를 받아본 기대승은 1561년 1월, 다시 이를 비평하며 이황에게 편지를 보낸다[高峯答退溪再論四端七情書](이황, 기대승, 2014, pp. 203-204). 이 편지에서 기대승은 이황의 “논변 제2서”의 다섯 가지 조목 중 “넷째, 근본은 같지만 다르게 나아간 것” 여덟 조항과 “다섯째, 의견이 달라서 끝내 따를 수 없는 것” 아홉 조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이황, 기대승, 2006, pp. 407-456). 그 중 “제5ㆍ7ㆍ9ㆍ12ㆍ14 조”(이황, 기대승, 2006, p. 448)에 대해 논하면서 사단과 칠정의 선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기쁨ㆍ노여움ㆍ슬픔ㆍ즐거움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이 이에서 발현하는 것입니까 기에서 발현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발현하여 절도에 맞아 가는 곳마다 선하지 않음이 없다는 선과 사단의 선은 같습니까 다릅니까?12) 만약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이 바로 이에서 발현된 것이고 그 선이 같다고 하신다면, 위의 다섯 조항에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마땅한 논의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이황, 기대승, 2006, p. 449)

1566년 7월, 이황에게 보낸 “사단칠정총론(四端七情總論)”(이황, 기대승, 2006, p. 603)에서 기대승은 희로애락의 감정과 희로애구애오욕의 칠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른바 감정이란 희ㆍ로ㆍ애ㆍ구ㆍ애ㆍ오ㆍ욕의 감정으로서 《중용》의 이른바 희ㆍ로ㆍ애ㆍ락과 동일한 감정입니다”(이황, 기대승, 2014, p. 145).13) “고봉답퇴계 제3서”에서 기대승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마찬가지로 이(理)에서 발한 것이며,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아 가는 곳마다 선(善)하지 않음이 없다’는 선은 사단의 선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칠정총론”에서도 볼 수 있다. “희ㆍ로ㆍ애ㆍ락이 발현해 절도에 맞는 것은 곧 이치이고, 선이며”(이황, 기대승, 2014, p. 145).14) 다음 내용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칠정은 비록 이치와 기운을 겸하지만, 이치는 약하고 기운은 강해 관섭하지 못하면 악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기운의 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칠정 가운데 발현해 절도에 맞는 것은 이치에서 발현해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사단과 애당초 다르지 않습니다.(이황, 기대승, 2014, pp. 145-146)15)

“고봉답퇴계 제3서”를 받아 본 이황은 1562년 10월, 기대승의 편지 중 몇 단락을 비평하여 기록하였다(이황, 기대승, 2006, p. 476). 그러나 이 편지를 기대승에게 보내지는 않았다(이황, 기대승, 2006, p. 476). 이 편지에서 이황은 기대승의 위 주장 중 절반을 수용한다. 즉, ‘희로애락의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마찬가지로 이에서 발한 것’이라는 주장과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아 가는 곳마다 선(善)하지 않음이 없다는 선은 사단의 선과 같다’는 주장 중 전자는 받아들이지 않고, 후자는 수용한다. 이황은 희로애락의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이 “비록 기에서 발현한 것이지만, 이가 타서 주인이 되는 까닭에 그 선함은 같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74)16)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1568년, “9월 이후 퇴계는 경연에서 왕을 위하여 아홉 차례의 강의를 하였다”(이황, 2012, p. 31). 그리고 12월에는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린다(이황, 2012, p. 31). 이 책의 여섯 번째 도(圖)인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이루는 세 개의 그림 중 상도(上圖)는 “원대(元代)의 성리학자 임은(林隱) 정복심(程復心, 1279~1368)”(이황, 2012, p. 32)이, 중도(中圖)와 하도(下圖)는 이황이 그렸다(이황, 2012, p. 89).17) 이 두 개의 그림 안에는 “특히 고봉 기대승과의 오랜 기간에 걸친 서신 왕래를 통하여 정립된 사단칠정에 대한 퇴계의 정설이” 갖추어져 있다(한국사상연구소, 2011, p. 98). 이 책은 그동안의 학문적 연구를 총집결하여 “국가의 운명을 떠맡고 있는 왕에게 바치기 위하여 저술된 작품이므로 정성을 다한 퇴계의 대표작”(이황, 2012, p. 4)이자, “당시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총결산서와 같은 것”(이황, 2010, p. 298)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자 곧바로 宣祖는 물론 많은 선비들까지 병풍으로 만들어 애독하였으며, 중국에서도 이황이 생존해 있을 때 이미 이 책이 간행된 이후… 많은 학자들이 극찬”(한국사상사연구회, 2000, p. 137)할 정도였다.

가. 중도(中圖)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이황은 중도에 대해 “기품(氣稟) 가운데 나아가 기품과 섞이지 않은 본연의 성을 가리킨 것”(이황, 2012, p. 89)18)이라고 설명하고, 정(情)에 관해서도 “성을 이미 이와 같이 말하였기 때문에 발하여 정이 된 것에 대해서도 선한 것만 가리켜 말하였습니다”(이황, 2012, p. 90)19)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 대해 선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었다. ‘기품 가운데 나아가 기품과 섞이지 않은 본연의 성을 가리킨 것’의 예로는 “자사(子思)가 ‘하늘이 명했다’는 성이나 맹자가 ‘본성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의 성, 정자가 ‘성이 곧 이(理)’라고 말했을 때의 성이나 장횡거가 ‘천지의 성’이라고 말했을 때의 성”(이황, 2012, pp. 89-90)20)등을 제시하였다. ‘발하여 정이 된 것 중 선한 것만 가리켜 말한 정’의 예로는 다음을 대표로 들었다.

자사가 말한 ‘중절’(中節)의 정이나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정이나 정자가 ‘어찌 선하지 않다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을 때의 정이나 주자가 ‘성으로부터 흘러 나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말했을 때의 정이 이것입니다.(이황, 2012, p. 9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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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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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도(下圖)에 드러난 이황의 입장

기(氣)와 섞이지 않은 이(理)만 가리킨 ‘천지의 성’과 ‘사단’을 표현한 중도(中圖)와 달리, 하도는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말한 것”(이황, 2012, p. 90)23)이라고 설명한다. 정(情)에 있어서의 ‘이와 기의 합’에 대해서는 “이와 기가 서로 의존하거나 서로 해친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황, 2012, p. 91)24)이라고 덧붙인다. 중도에서 이(理)만 가리키고, 선(善)만 가리킬 때는 사단만 예로 들었지만 이번에는 칠정과 사단을 모두 거명한다. 칠정과 사단 모두 ‘이와 기의 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황은 ‘이와 기가 서로 의존’하면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선이 되고, ‘이와 기가 서로 해치면’ 사단과 칠정 모두 선하지 않게 된다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예컨대 사단의 정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니 본래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의 발함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기에 가리워진 뒤에 유실되어 선하지 않게 됩니다. 일곱가지 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니, 역시 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일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못하여 이를 멸하게 되면 방탕해져 악이 됩니다.(이황, 2012, p. 91)25)

이황은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 칠정에 관한 대전환을 시도하였다. 기대승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의 ‘유선악’과 “논변 제1서”에서의 ‘선악미정’을 뛰어넘어 ‘본래는 선하다’로의 대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성학십도”의 하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칠정도 사단과 마찬가지로 ‘역시 선하지 않음이 없지만’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못하면 악이 된다는 것이다. “논변 제2서”에서는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의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는 정[本善易流於惡]’과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음’이 함께 등장했다. ‘이’가 있어 ‘본래는 선하지만’,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566년 7월에 기대승이 쓴 “사단칠정 후설”과 “사단칠정 총론”을 받고, 그 해 11월 “거듭 기명언에게 답함〔重答奇明彦〕”을 쓴 후, 2년이 지난 1568년 12월의 “성학십도”에도 고스란히 담겼던 것이다(이황, 기대승, 2006, p. 603; 이황, 기대승, 2014, p. 206).

그런데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의 칠정에 관한 대전환보다 더 큰 변화가 이 하도에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사단’에 관한 것이다.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칠정에 대해 1559년 1월부터 1566년 11월까지 편지를 통해 논쟁하면서 기대승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치기도 하였다.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는 7군데를 수정하기도 하였다(이황, 기대승, 2006, pp. 399-405). 그러나 사단의 ‘순선함’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1560년 8월, 기대승은 “고봉답퇴계 제2서”에서 사단도 모두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사단이 발현하는 데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니, 본래는 모두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이황, 기대승, 2014, p. 77).26) 그러나 이러한 기대승의 발언에 대해 이황은 “사단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논의는 비록 매우 새롭기는 하지만, 역시 맹자의 본뜻이 아닙니다”(이황, 기대승, 2014, p. 109)27)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신이 “이가 완전하게 발현하지 못해서 기에 가려지면 선하지 못한 쪽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황, 2005, p. 124)28)이라며 사단도 ‘이가 완전하게 발현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고, ‘이가 기에 가려질 수 있음’도, ‘선하지 못한 쪽으로 흐를 수도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가 완전하게 발현하지 못해서 기에 가려진다’는 것은 기대승이 주장한 ‘절도에 맞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선하지 못한 쪽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 역시 기대승의 ‘진실로 모두 다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와 일맥상통한다.

기대승은 이황의 “논변 제2서”를 받고 쓴 1561년 1월, “고봉답퇴계 제3서[高峯答退溪再論四端七情書]”에서 “사단은 바로 칠정 가운데 발현해 절도에 맞는 묘맥이다”(이황, 기대승, 2014, p. 120)29)라며 사단이 ‘절도에 맞는 묘맥’임을 강조하며, ‘사단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단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은 대개 일반 사람들의 감정은 기품과 물욕에 얽매여서 혹 천리가 잠깐 발현해도 금방 기품과 물욕에 구속되고 가려지므로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일 뿐, 진실로 사단도 이치와 기운을 겸하고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이황, 기대승, 2014, p. 121)

기대승은 일반 사람들의 감정을 예로 들며 사단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음을 재차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단이 기운을 겸한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사단에 악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러니 기대승은 “고봉답퇴계 제2서”에서의 ‘사단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모두 다 선한 것은 아니다’에서 “고봉답퇴계 제3서”의 위 주장에서는 ‘사단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입장은 계속해서 주장하지만, ‘사단도 모두 다 선한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철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봉답퇴계 제3서”의 “조목의 열거〔條列]”(이황, 기대승, 2014, p. 122) 중 “제1ㆍ제2조목”에서도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계속된다.

사단과 칠정은 이가 기질에 떨어진 뒤의 일이니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비슷한데, 칠정은 그 빛에 밝고 어두움이 있는 것이며, 사단은 특별히 밝은 것입니다. 칠정에 밝고 어둠이 있음은 진실로 물의 흐림 때문이고,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음은 비록 빛이 밝지만 물결의 움직임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런 이치로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이황, 기대승, 2006, p. 446)

사단이 ‘특별히 밝기는 하지만 절도에 맞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하며, 그 이유로 물결의 움직임을 피하지 못한 것을 제시하였다.

기대승은 “고봉답퇴계 제3서”의 “후론後論”(이황, 기대승, 2006, p. 457)에서 다시 한 번 더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입장을 설명한다. 먼저, 그는 이러한 그의 주장이 이황의 수긍을 받지 못할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살피면 얼핏 보아 해괴한 듯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선생님의 인가를 받지 못할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 과연 그러합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59). “고봉답퇴계 제2서”에서 ‘사단도 부중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이 ‘사단은 항상 절도에 맞는다’고 여기고 있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볼 때 ‘해괴’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대승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맹자의 본의(本意)’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정’이 이렇게 될 수 있음을 가리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의 주장은 애당초 맹자의 본 뜻이 이와 같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만 보통 사람들의 정情이 이럴 수도 있다고 한 것뿐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59). 기대승은 이황을 설득하기 위해 성리학자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책을 인용한다.

그 말 또한 연원이 있습니다. 『주자어류』를 보면 맹자의 사단을 논한 곳의 한 조목에서 “측은과 부끄러워하고 미워함[羞惡]도 절도에 맞고 맞지 않음이 있다. 만약 측은해서는 안 될 때 측은해 하거나, 부끄러워하고 미워해서는 안 될 때에 부끄러워하고 미워한다면 바로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다.”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맹자가 이미 한 말씀을 가지고 미비한 부분을 드러내 밝힌 것으로서 생각해 볼 여지가 아주 많이 있으니 깊이 살펴야 하겠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p. 459-460)

기대승은 맹자의 사단에 해당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마저도 ‘절도에 맞지 않음이 있음’을 주자를 통해 반증하고 있다. 계속해서 기대승은 사실 ‘순수한 천리인 사단’은 ‘성현’이나 ‘날 때부터 아는 성인’에게만 해당되고, 일반인들은 ‘기품과 물욕의 가림’이 있어 그 사단이 ‘순수한 천리’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맹자가 성선性善의 이치를 드러내 밝히면서 사단으로써 말했으니, 대체로 언제나 선하다고는 했으나 세밀한 곳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성현은 적으나 어리석고 불초한 이는 많으며, 나면서부터 아는 이는 적으나 배워서 아는 이와 어렵게 아는 이는 많으니, 진실로 날 때부터 아는 성인이 아니고서야 그 발현하는 사단이 어찌 순수한 천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기품과 물욕의 가림이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이황, 기대승, 2006, p. 460)

이를 통해 기대승은 “사단은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만 하여 그 뜻을 확충하고자 한다면, …선을 끝까지 다 밝히지 못하게 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힘써 행하게 될까”(이황, 기대승, 2006, p. 460) 두렵다고까지 말하며 이황의 사단에 관한 입장을 비판한다. 이어서 그는 칠정이나 사단이나 모두 ‘이(理)의 본체’를 지니고 있지만 ‘기(氣)에 의해 가려지면’ 그 발현한 것에 흐림과 거짓이 있을 수 있다며 해와 구름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이理는 해가 공중에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은 늘 새로워서 비록 구름과 안개가 일어도 줄어들지 않고 늘 그대로입니다. 다만 구름과 안개에 가렸기 때문에 흐리기도 하면서 날씨가 고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걷히면 빛이 다시 아래 세상에 두루 비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빛이 더해진 것이 아니고 본래 그대로입니다.

이가 기에 있음도 이와 같습니다. 기쁨ㆍ노여움ㆍ슬픔ㆍ즐거움과 측은한 마음ㆍ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ㆍ사양하는 마음ㆍ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의 이가 뒤섞여 속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본체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기품과 물욕이 구속하고 가리면, 이의 본체는 그대로지만 그 발현한 것에는 흐림과 맑음, 진리와 거짓의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품과 물욕의 얽매임을 다 없앤다면 그 본체의 흐름이 어찌 해가 아래를 두루 비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이황, 기대승, 2006, pp. 466-467)

사단이나 칠정 모두 이의 본체를 지니고 있지만 기에 의해 가려지면 ‘흐림과 거짓’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승의 이 주장은 “성학십도”, ‘심통성정도’의 하도(下圖)에서의 이황의 주장과 유사하다.

하도는 리理와 기氣를 합하여 말한 것이니…. 성을 말한 것이 이미 이와 같기 때문에 발하여 정이 되는 것도 리와 기가 서로 돕거나(相須), 혹 서로 해치는(相害)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사단의 정은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니, 본래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으며, 반드시 리의 발함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기에 가리워진 연후에야 흘러가서 선하지 않게 됩니다.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에 타는 것이니, 역시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만일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않아 그 리를 멸하게 되면 방자하게 되어 악이 됩니다.(한국사상연구소, 2011, pp. 102-103)30)

이황 역시 기대승의 “고봉답퇴계 제3서”, “후론”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사단과 칠정 모두 본래는 선하지만, 이(理)가 기(氣)에 의해 가리워지거나 멸하여지면 불선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이황의 사단관이 처음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와 “논변 제2서”에서의 ‘무불선’, “논변 제1서”와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의 ‘사단은 다 선하다’는 입장으로부터 “성학십도”에서는 ‘선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정’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온 데에는 기대승과의 논쟁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대승의 입장을 많이 반영하였기에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올리기 전 기대승에게 먼저 보내어 자신있게 검토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립니다.

지금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보냅니다. 잘못된 곳이 있으면 가리켜 논박한 뒤 돌려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황. 일단은 다른 사람 눈에 띄게 하지 마십시오.(이황, 기대승, 2006, p. 220)

기대승 역시 이황의 “성학십도”를 본 후 비록 “제 생각에는 더 살필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 잠깐 두었으면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내일쯤 임금께 올려도 되지 않겠습니까?”(이황, 기대승, 2006, p. 221)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심통성정도’와 그에 대한 이황의 해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수정 의견도 없었다. 오히려 “『성학십도』가 매우 정밀하고 정확하니 받들어 임금께서 보시도록 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221)라며 칭송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이황의 “성학십도” 특히, 자신과 논쟁을 벌인 사단칠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심통성정도’와 그에 대한 이황의 해설이 자신의 입장을 대폭 수용하였다고 판단한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퇴계가 직접 그린 중도와 하도에는 퇴계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얻은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한국사상연구소, 2011, p. 25)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III. “윤리와 사상” 교과서의 ‘이황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선악관(善惡觀)’에 관한 내용 분석

1. 내용의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교과서
가. 미래엔 “윤리와 사상” 교과서
1) 정확도가 타 교과서에 비해 높은 부분

미래엔 “윤리와 사상” 교과서(정창우 외, 2018)에서는 이황의 칠정관에 대해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으로 그 위에 올라탄 이가 주재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p. 59)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지학사, 천재교육, 교학사 교과서에 비해 비교적 내용의 정확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이후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에 이르기까지 칠정이 본래는 선하지만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되고, 절도에 맞으면 선이 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의 “칠정은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기 때문에 발현하여 절도에 맞아야만 조화롭다고 하고, 한 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은 이미 그 바름을 잃는 것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02)”, “논변 제2서”의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20), “성학십도” ‘심통성정도’의 “칠정은 기가 발하매 이가 기를 탄 것(氣發而理乘之)인데 역시 불선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기가 발한 것이 중절(中節)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입니다”(이황, 2010, p. 342) 등이 모두 칠정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미래엔 교과서의 이 서술에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황의 칠정관에 대해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서술하였으면 하는 안타까움이다. 왜냐하면 ‘칠정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이황의 칠정관에 있어 대변혁을 보인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이전에도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황은 사단칠정 논쟁의 시발점이 되는 1559년 1월의 “기명언 대승에게 드림[與奇明彦大升(己未)]”에서도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고 있으므로 선악이 있다”(윤사순, 2013, p. 124)고 하였다. 이것은 칠정의 ‘선악미정’을 강조한 “논변 제1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에서도 드러난다.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한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발현된 뒤 절도에 맞은 다음에야 조화롭다고 하는 것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359)

그러므로 미래엔 교과서의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으로 그 위에 올라탄 이가 주재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서술은 이황 칠정관의 변화를 가져온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이후의 입장인지 아니면 이황이 잘못을 시인한 그 이전의 입장인지 분명하지 않다. 더욱이 이황의 “평생의 삶과 학문이 응축되어 있”(이황, 2012, p. 4)고, “그의 학문의 온축(蘊蓄)을 남김없이 쏟은 것이라 할 수 있”(이황, 2010, p. 298)는 “성학십도”에서는 ‘칠정도 본래는 선함’을 ‘사단의 본래 순선(純善)함’과 연결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칠정은 … 역시 불선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기가 발한 것이 중절(中節)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이황, 2010, p. 342)이라는 부분은 그 위에 기록된 “사단의 정은 … 본래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습니다.”(이황, 2010, p. 342)의 연장선에서 기록된 것이다. 사단이 ‘본래 순선하여 악이 없음’과 같이 칠정 ‘역시 악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한 사단이 이후에 ‘이의 발함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기에 가리워진 뒤에 유실되어 선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칠정 역시 ‘기가 발한 것이 중절(中節)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여 ‘원래 선, 이후 기에 가리워지면 악’의 구도를 사단과 칠정 모두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이 서술은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으로 본래는 선하지만 기가 이(理)를 가리거나 멸하면 악하게 된다’는 이황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2) 정확도가 낮은 부분
가) 이황의 사단 선악관

미래엔 교과서에서 정확도가 낮은 부분은 “사단은 마음의 이(理)가 직접 발동한 것으로 순수한 선”(p. 59)이라는 서술이다. 사단을 ‘순수한 선’으로만 강조한 것은 이황이 그의 “사상적 입장이 집약적으로 반영된 저작”(최재목, 2007, p. 4)인 “성학십도”를 저술하기 이전의 입장이다. 이황의 “대표적 저술의 하나”(한국사상사연구회, 2000, p. 89)이자 “68세의 노숙老熟한 이황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한국사상사연구회, 2000, p. 89) 책이며, “주자학의 … 핵심만을 남겨 놓은, 가위 주자학의 문법이자 설계도에 해당”(한형조, 2010, p. 75)하며, “그의 유명한 사단칠정론도 이 설계도 안에서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한형조, 2010, p. 75)고 할 수 있는 “성학십도”에서는 분명 칠정이 ‘악’으로 흐를 수 있음과 같이 사단도 ‘불선’으로 갈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단은 이가 발동하면서 여기에 기가 따르는 것이어서 본래 순선(純善)할 뿐 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가 발동하여 미처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려진 뒤에는 불선(不善)으로 흘러갑니다.(이황, 2016, p. 396)

그러므로 교과서의 이 서술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을 마무리하고, 그 성과를 반영하여 저술한 “성학십도”의 입장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도외시한다면 그의 사상은 결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한국사상사연구회, 2000, p. 89)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황의 입장은 기대승이 “고봉답퇴계 제2서”에서 “만약 넓게 정을 다루어 자세히 논한다면, 사단의 발현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니 진실로 모두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391)라고 주장하고, “고봉답퇴계 제3서”의 “후론”에서는 사단이 절도에 맞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한 것과 상통한다.

기대승이 “주자어류”의 내용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처럼 주자 역시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같은 선한 정감四端 또한 정감이기 때문에 각 상황에 딱 맞는 경우도 있지만 딱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측은하게 여기거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 옳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그 상황에 딱 맞지 않게 정감이 드러나는 경우이다.

『주자어류』 「공손추상지하」(이상호, 2014, p. 146)31)

김기현은 “주자의 정 이론에 충실한 성리학자라면 그 누구도 4단이 기의 발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4단에 불선의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은 당연한 일”(2000, pp. 204-205)이라고 주장한다. 주자에 있어 사단 역시 정(情)이며, ‘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주자의 입장에 따라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어 선과 악이 병존”(김기현, 2000, p. 204)하는 기(氣)의 특성상 기가 발한 사단도 “선과 악이 병존함은 피해갈 수 없는 사실”(김기현, 2000, p. 205)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이 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퇴계도 역시 인정하는 바”(민족과 사상 연구회, 1992, p. 52)라며 그 근거로 “성학십도”를 제시하였다. 김기현은 절도에 맞지 않아 “악한 사단”(민족과 사상 연구회, 1992, p. 52)을 이황이 “후천적인 왜곡 현상으로 간주”(민족과 사상 연구회, 1992, p. 53)했다며 이황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천부의 선한 본성이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방종한 삶 속에서 드러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깊히 묻혀 버릴 ―그러나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수도 있으며, 이에 따라 드물게나마 나타날 본성의 발로로서의 사단도 제 모습을 얻지 못하고 뒤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과 사상 연구회, 1992, p. 53)

이상호는 이 부분이 “맹자와 주희의 철학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2014, p. 146)이라고 본다. 맹자는 사단을 “해석할 때 ‘선함’에 무게를”(이상호, 2014, p. 146) 두는 데 비해 “주희는 정감에 무게를 두고 해석했다”(이상호, 2014, p. 146)는 것이다. 주자는 사단도 정이기에 정의 일반적 속성인 불선의 가능성을 당연히 가진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상호는 이를 “주자학에서 말하는 ‘악의 가능성’으로, 정감이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할 경우가 있다는 의미”(이상호, 2014, p. 147)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홍성민은 주자가 “사단과 칠정이 모두 악의 위험과 선의 가능성을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단과 칠정을 가르는 구획선도 상당히 흐릿한 것으로 여겼다”(2016, p. 131)고 강조한다. 주자가 “감정의 도덕성 여부를 사단과 칠정이라는 범주로 구분한 적이 없”(홍성민, 2016, p. 131)다는 것이다. 홍성민은 주자에 있어 사단이 악할 수 있는 근거를 주자가 주장한 “天命의 性은 기질을 토대로 삼아야 현실에 감정으로 드러날 수 있”(2016, p. 136)음에서 찾는다. 주자에 있어 기질은 어둡고, 얇을 수 있으므로 사단 역시 악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자가 본 사단은 “현실의 기질 안에서 원개념 그대로의 사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홍성민, 2016, p. 136)며 다음과 같은 주자의 말을 논거로 제시한다.

天命의 性 자체는 본래 치우침이 없지만 단지 기질을 품부 받은 것에 따라 치우치는 부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질에 昏明厚薄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仁義禮智 그 자체는 하나도 결여되는 것이 없다. 다만 惻隱함이 많으면 姑息과 유약함에 빠지기 쉽고 羞惡함이 많으면 수오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도 수오하는 경우가 있다.(홍성민, 2016, p. 135)32)

최영진은 “사단도 부중절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불선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자의 견해는 사단은 순선무악하다는 맹자의 입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2017, p. 96)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황이 “성학십도”에서 주장한 사단의 불선 상태는 “리가 드러나고 기가 순수하여 선한”(최영진, 2017, p. 113) 직후에 “ ‘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고자 함, 마을사람들에게 칭찬받고자 함, 비난의 소리를 싫어함’ 등등의 욕망이 발생하여 사단을 방해하고 훼손한 것”(최영진, 2017, p. 114)이라며 “리가 발현하였으나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기에 엄폐되어 불선으로 흐르게 된 상태”(최영진, 2017, p. 114)로 설명한다. 이어서 그는 “<심통성정도>의 이론체계로서 ‘사단무불선’라는33) 진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는 어려운 것”(최영진, 2017, p. 116)이라며 퇴계의 주장이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단의 리는 순선무악하지만 그 리의 발현에 수반되는 기가 변화하여 혼기昏氣가 되어 리를 엄폐할 경우 사단은 불선하게 된다”(최영진, 2017, p. 116). 사단칠정에 관한 퇴계의 규정에 의하면 “사단이 ‘무불선’하기 위한 조건은 바로 ‘순리純理’”(최영진, 2017, p. 118)인데, “퇴계의 ‘사단리발이기수지’에 의하면, 사단은 칠정과 동일하게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무불선할 수가 없다”(최영진, 2017, p. 118)는 것이다. 최영진은 삼단논법을 통해 이황에 있어서의 사단이 불선 가능함을 명확하게 정리한다.

A. 사단지발四端之發, 순리고무불선純理故無不善

대전제 : 리는 무불선하며 기는 유선악하다.

소전제 : 사단의 발동은 순수한 리이다.[사단은 리가 발현된 것이다]

결 론 : 사단은 무불선하다.

B. 사단리발이기수지四端理發而氣隨之, 고유선악故有善惡.

대전제 : 리는 무불선하며 기는 유선악하다.

소전제 : 사단은 리와 기를 겸하고 있다.

결 론 : 사단은 유선악하다.(최영진, 2017, pp. 118-119)

이광호는 이황이 사단도 악하게 될 수 있다고 본 이유를 “현실적인 인간의 성정”(이황, 2012, p. 148)에서 찾았다. 즉,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선한 것으로 설명”(이황, 2012, p. 147)된 중도(中圖)와 달리 “사단과 칠정이 모두 악하게 될 수도 있다”(이황, 2012, p. 147)고 기술된 하도(下圖)는 이황이 인간의 성정을 보다 현실적 입장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윤천근은 이황의 사단이 “두 가지 의미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다”(2017, p. 261)며, “하나는 ‘순수한 四端’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四端’”(2017, p. 261)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 중 순수한 사단은 “순수한 理만의 發이고, 氣와는 무관한 것”(윤천근, 2017, p. 261)이기에, “원리적인 것이라 하겠고, 실제적으로 물질세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윤천근, 2017, p. 262)고 보았다. 이에 비해 실제적 사단은 “氣작용과 연계되어 있는 것”(윤천근, 2017, p. 262)으로서 “‘理發而氣隨之’의 四端”(윤천근, 2017, p. 266)이며, “中節 不中節로 나뉘어질 수 있고, 中節인 것은 善한 것이며, 不中節인 것은 惡한 것”(윤천근, 2017, p. 266)으로 보았다. 이황에 있어서의 실제적 사단은 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미래엔 교과서는 사단에 대해 “마음의 이(理)가 직접 발동한 것으로 순수한 선”이라고 서술한 같은 페이지에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를 제시하고 그에 대해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황이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열 개의 도설(圖說)로 간략히 설명한 성학십도(性學十圖) 중 여섯 번째 도설인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이황은 여기에서 사단 칠정과 이기(理氣)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교과서는 이황의 사단칠정관에 있어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로 인해 그림과 간단한 설명까지 기술했지만 정작 “성학십도”에서 이황이 강조한 내용은 교과서 서술에 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사단은 마음의 이(理)가 직접 발동한 것으로 순수한 선”(p. 59)이라는 서술은 “성학십도”의 내용을 반영하여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나) 본성과 감정

이 교과서의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해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단 칠정 논쟁’을 통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발전시켰다”(p. 59)는 부분도 정확성이 떨어진다. ‘사단 칠정 논쟁’이나 ‘이기호발설’은 ‘본성’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감정’에 관한 논쟁이자 학설이다. 이황은 기대승과의 논쟁에서 “대개 사단은 감정이고 칠정 또한 감정입니다. 같은 감정인데 어째서 사단ㆍ칠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을까요?”(이황, 기대승, 2014, p. 40)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이 ‘감정’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서 이황은 성(性)과 정(情)을 분명히 구분한다. “감정에 사단ㆍ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에 ‘본연’과 ‘기품氣稟’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이황, 기대승, 2014, p. 41). 그는 성(性)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연의 성〔本然之性〕”과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제시하고, 감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단과 칠정을 명시하였다(이황, 기대승, 2014, p. 40). 이것은 이황이 “논변 제2서”에서 “제1절, 《주자어류》의 마음ㆍ본성ㆍ감정을 논한 것을 인용한 세 조목….은 저의 견문과 같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이황, 기대승, 2014, pp. 86-87)다며 지지했던 기대승의 주장을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자어류》 가운데 한 조목을 살펴보면, “본성이 막 발현하면 바로 감정인데, 감정에는 선과 악이 있지만 본성은 온전히 선하며,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총괄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또 한 조목에서는, “본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이 발현한 감정에는 혹 선하지 않음이 있지만….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는 감정이 발현된 것의 명칭이니, 바로 이 때문에 감정이 본성에서 나와서 선하다는 것이다”했습니다.(이황, 기대승, 2014, pp. 48-49)

즉,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단 칠정 논쟁’에서 마음, 본성, 감정의 의미를 구분한 주자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감정은 본성이 발현한 것이고, 사단 역시 본성이 아니라 감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해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단 칠정 논쟁’을 통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발전시켰다”로 되어 있는 교과서의 이 서술은 ‘인간의 감정에 대해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단 칠정 논쟁을 통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발전시켰다’로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다) “성학십도”의 한자 표기

이 교과서에서 성학십도의 한자를 “性學十圖”(p. 59)로 표기한 것은 ‘聖學十圖’로 수정하여야 한다. ‘성학’은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이황, 2010, p. 298) 또는 “특히 임금에 대하여는 ‘성왕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임을 강조”(이황, 2010, p. 298)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황은 “성인다운 왕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성인의 경지로 안내하는 의도로”(한국사상사연구회, 2000, p. 128) ‘聖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는 이황이 “성학십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는 차(箚)와 도(圖)”에서 “도를 이루어 성인이 되는 요령과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경륜(經綸)하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이황, 2012, p. 40)34) 다고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나. 금성 “윤리와 사상” 교과서
1) 정확도가 타 교과서에 비해 높은 부분

금성 “윤리와 사상” 교과서(김선욱 외, 2018)에서는 이황의 칠정관에 대해 “퇴계 이황은…. 칠정은 선악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p. 58)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지학사, 천재교육, 교학사 교과서의 관련 서술에 비해서는 다소 내용의 정확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1559년 1월 “기명언 대승에게 드림[與奇明彦大升(己未)]”에서 이황은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고 있으므로 선악이 있다”(윤사순, 2013, p. 124)고 하였다. 1560년 11월,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논변 제2서”에서도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20)라고 쓰고 있다. 칠정의 ‘유선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성 교과서의 서술이 지학사의 “칠정은 선과 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천재교육의 “선악이 혼재된 칠정”, 교학사의 “선악이 섞인 것”이라는 서술보다는 정확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미래엔 교과서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금성 교과서의 서술에서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황은 칠정도 ‘본래는 선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변 제2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의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 “칠정은 본래 선하지만”(이황, 기대승, 2006, p. 402), “성학십도(聖學十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의 하도(下圖)에 관한 설명에서 “일곱가지 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니, 역시 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이황, 2010, p. 91)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래는 선하지만’ 발현한 기가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으로 흐를 수도 있기에 ‘유선악’한 정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황의 칠정 ‘유선악’을 금성 교과서의 서술처럼 ‘선악이 함께 존재한다’로 서술하지는 않고 있다. ‘함께’라는 단어는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국립국어원, 2017), “(ㄱ)(기본의미)한데 섞여 어우러져, (ㄴ)여럿이 한데 어울려”(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9)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황은 칠정에 ‘선악이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선악이 한데 섞여 어우러져 있거나 선악이 한데 어울려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본래는 선하지만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못하여 이를 멸하게 되면 방탕해져 악이 된다’는 것과 ‘선악이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는 ‘유선악’에 대한 학자들의 번역에서 잘 드러난다. 김영두의 “선악이 있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20), 윤사순, 임헌규, 최영진의 “선과 악이 있다”(이황, 2010, p. 249; 이황, 기대승, 2014, p. 99; 최영진, 2012, p. 175), 김기현의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2000, p. 152)와 “선과 악이 있다”(민족과 사상 연구회, 1992, p. 63), 고산의 “선악이 있는 것입니다”(이황, 2016, p. 434), 이상은의 “선악이 있는 것이다”(예문동양사상연구원, 윤사순, 2008, p. 285), 유정동의 “선악이 있다”(2014, p. 304), 금장태의 “선과 악이 있는 것이요”(2012, p. 257) 등에서 ‘함께’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금성 교과서의 이 서술 역시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본래는 선하지만 기가 이를 가리거나 멸하면 악하게 된다’라는 이황의 입장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정확도가 낮은 부분

금성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는 이황의 사단 선악관에 대해 “사단은 순선하고”(p. 58)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 역시 미래엔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사단의 불선 가능성을 밝힌 이황의 “성학십도”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보완 서술이 필요하다.

2. 내용의 정확도가 낮은 교과서
가. 지학사 “윤리와 사상” 교과서
1) 이황의 칠정 선악관

지학사 “윤리와 사상” 교과서(박병기 외, 2018)에서는 이황의 칠정 선악관에 대해 “칠정은 선과 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므로”(p. 60)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칠정이 ‘선악미정’이라고 한 견해는 이황이 1559년 10월, “논변 제1서[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음 해 8월, 기대승이 “고봉답퇴계 제2서[高峯答退溪論四端七情書]”에서 “사단은 본래 선한 것이고 칠정 역시 모두 선한 것입니다. 다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한 편에 치우쳐 악하게 되는 것일 뿐이니, 어찌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겠습니까?”(이황, 기대승, 2006, p. 380)라고 비판하자 그 비판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해 11월, “기명언에게 답함 : 사단칠정을 논한 두 번째 서간[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의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 수정하였다. “논변 제1서”의 “칠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한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발현된 뒤 절도에 맞은 다음에야 조화롭다고 하는 것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359)를 “칠정은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기 때문에 발현하여 절도에 맞아야만 조화롭다고 하고, 한 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은 이미 그 바름을 잃는 것입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02)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자신의 ‘칠정 선악미정’이라는 이전 견해를 수정하였음을 분명히 기록하였다.

“본래 선하지만…”이하는 지난번에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한번 이루었다 하더라도 잘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발현된 뒤 절도에 맞은 다음에야 조화롭다고 하는 것입니다.”했습니다만 지금 고쳤습니다. (이황, 기대승, 2006, p. 402)

함께 보낸 “논변 제2서”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하며,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제 말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으로, 역시 이미 고쳤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08)라며 ‘칠정 선악미정’의 옳지 않음과 그 수정을 고백하였다. 칠정이 ‘선악미정’이 아니라 ‘본래 선하다’는 이황의 전회(轉回)는 그의 “온 지혜가 다 기울”(이황, 2016, p. 361)여진 “성학십도” ‘심통성정도’의 하도(下圖)에 대한 설명에서도 이어졌다.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에 타는 것이니, 역시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한국사상연구소, 2011, p. 103). 그러므로 지학사 교과서의 ‘칠정은 선과 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부분은 ‘칠정은 본래 선하지만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된다’로 수정하여야 마땅하다.

2) 이황의 사단 선악관

지학사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는 이황의 사단 선악관에 대해 “사단은 순선하므로”(p. 60)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역시 사단도 불선으로 흐를 수 있다고 본 이황 “성학십도”의 입장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 천재교육 “윤리와 사상” 교과서
1) 이황의 칠정 선악관

천재교육 “윤리와 사상” 교과서(박찬구 외, 2018)에서는 이황의 칠정관에 대해 “선악이 혼재된 칠정”(p. 62)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혼재(混在)’라는 표현은 “뒤섞이어 있음”(국립국어원, 2017), “(둘 이상의 대상이, 또는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과)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9)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황은 칠정에 대해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본래 선하지만 쉽사리 악으로 흐르기 때문에 발현하여 절도에 맞아야만 조화롭다”(이황, 기대승, 2006, p. 402)는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을 바탕으로 해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420)라는 “논변 제2서”의 입장과 “역시 불선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기가 발한 것이 중절(中節)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입니다”(이황, 2010, p. 342)라는 “성학십도”에서의 주장을 보면 칠정이 ‘선악이 뒤섞여 있는 정’이 아님은 분명하다. ‘유선악(有善惡)’이 ‘선악혼재(善惡混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선하지만 악으로 흐를 수도 있기에 유선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이 혼재된 정’이라는 칠정에 관한 이 서술은 ‘본래 선하지만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되는 정’으로 수정하여야 한다.

2) 이황의 사단 선악관

천재교육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는 사단의 선악관에 대해 “순선한 감정인 사단(四端)”(p. 62)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지학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사단도 불선으로 흐를 수 있다고 주장한 이황의 “성학십도”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보완 서술이 필요하다.

다. 교학사 “윤리와 사상” 교과서

교학사 “윤리와 사상” 교과서(박효종 외, 2018)에서는 이황이 본 칠정에 대해 “선악이 섞인 것”(p. 53)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칠정을 “선악이 혼재한 ‘기’”(박효종 외, 2018, p. 53)와 연관시켜 ‘선악이 섞인 것’의 의미를 위에서 다룬 천재교육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선악의 혼재’로 보고 있다. ‘선악이 혼재된 칠정’이라는 천재교육 교과서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교학사 교과서의 이러한 표현 역시 이황의 정확한 입장으로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에서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한 논변을 벌이는 과정”이라는 조건을 두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에 관한 기대승과의 논변 과정’에서도 이황은 칠정이 ‘선악이 섞인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특히,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이후 ‘본래는 선한 정(情)으로 정해졌음’을 명시하였다. 본래는 선한 정으로 정해졌지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과 ‘선악이 섞인 것’은 다른 의미이다. ‘섞이다’는 “‘섞다(1.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한데 합치다, 2. 어떤 말이나 행동에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함께 나타내다)’의 피동사”(국립국어원, 2017), “(1) (둘 이상의 무엇이, 또는 무엇이 대상과) 한데 들어 합쳐지게 되다. (2) (어떤 감정이나 말, 행동 따위가 다른 말이나 글, 행동에) 함께 나타나다.”(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9)의 의미이다. 이황은 칠정이 ‘선악이 한데 합쳐진 정’이라거나 ‘선악이 함께 나타나는 정’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칠정에 관한 교학사 교과서의 이 서술 역시 ‘본래 선하지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되는 정’으로 수정하여야 한다.

IV. 결론

지금까지 2018년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5종 교과서에 서술된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의 선악관에 대해 그 정확성을 따져 보았다. 이를 위해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의 선악관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대표적 두 근거인 ‘기대승과의 편지’와 “성학십도”를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칠정의 선악에 대한 이황의 입장이 “기명언에게 답함 : 사단칠정을 논한 두 번째 서간[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의 “제1서를 고친 글[改本]”에서 ‘칠정도 본래 선하다[七情本善]’로 수정되었으며, 이러한 수정 입장이 “논변 제2서”와 “성학십도”에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칠정에 대한 이황의 입장은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으로 본래는 선하지만 기가 이(理)를 가리거나 멸하면 악하게 된다’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5종의 “윤리와 사상” 교과서 중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 교과서는 아쉽게도 없었다. 5종 중 상대적으로 타 교과서에 비해 정확성이 높다고 평가할 수 있는 미래엔 교과서도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으로 그 위에 올라탄 이가 주재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p. 59)라고 하여 ‘본래 선하다’는 이황의 입장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적 정확성이 높은 또 하나의 교과서인 금성 교과서도 “퇴계 이황은…. 칠정은 선악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p. 58)라고 하여 역시 이황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성이 낮은 교과서들은 오류가 더 심했다. 지학사 교과서는 이황이 분명히 오류를 인정하고 “제1서를 고친 글[改本]”이후에는 주장하지 않았던 ‘선악미정’의 입장을 담아 “칠정은 선과 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므로”(p. 60)라고 서술하고 있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이황이 ‘기대승과의 편지’와 “성학십도”에서 사용하지도 않았던 “선악이 혼재된 칠정”(p. 62)이라는 표현을 서술하고 있었다. 교학사 교과서도 같은 쪽에 서술한 “선악이 혼재한 ‘기’”(p. 53)와 연관시켜 칠정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의 “선악이 섞인 것”(p. 53)이라는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술들은 원래 이황의 입장을 반영하여 빠른 시일 안에 수정되어 학생들의 혼란을 줄여 주어야 할 것이다.

사단에 대해서는 ‘기대승과의 편지’에서는 불선함이 없고, 모두 다 선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논변 제2서”의 “후론”을 보낸 뒤 8년 후 “성학십도”에서는 사단도 ‘불선’으로 흐를 수 있다고 수정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황의 사단관에 대해 “윤리와 사상” 5종 교과서는 대부분 ‘기대승과의 논쟁’에서 드러난 입장만 서술하고 “성학십도”에서의 ‘사단 역시 불선 가능하다’는 입장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이황 사단칠정관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성학십도”의 내용이 반영되지 않은 이러한 교과서 서술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Notes

1) 최근 5개년의 수능 문제 중 이황을 다룬 문항은 2018학년도 11번, 2017학년도 7번, 2016학년도 6번, 2015 학년도 6-7번, 2014학년도 11번 등이 있다.

2)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與奇明彦」, “四端之發, 純理故無不善; 七 情之發, 兼氣故有善惡。”

3)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附奇明彥非四端七情分理 氣辯」, “則是理與氣判而爲兩物也, 是七情不出於性而四端不乘於氣也。”

4)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四端皆善也, 故曰‘無四者之 心, 非人也’, 而曰‘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七情, 善惡未定也。故一有之而不能察, 則心不得其正, 而 必發而中節, 然後乃謂之和。”

5)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改本」, “四端皆善也, 故 曰‘無四者之心, 非人也’, 而曰‘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七情本善, 而易流於惡, 故其發而中節者, 乃謂 之和, 一有之而不能察, 則心已不得其正矣。[‘本善而’以下, 舊作‘善惡未定也。故一有之而不能察, 則心不 得其正, 而必發而中節, 然後乃謂之和’, 今改。] ”

6)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改本」, “善惡未定之說。….右四條, 承誨, 覺己語有失稱停者, 亦已改之。”

7)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改本」, “或云無不善, 或 云有善惡, 恐人疑若有兩情有二善。”

8)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改本」, “滉謂純理故無不 善, 兼氣故有善惡, 此言本非舛理也。”

9) 이 부분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고봉전서(高峯全書)』,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상편』「퇴계가 사단ㆍ칠정을 논한 데 대해 고봉이 답한 편지」에서 “어찌 정이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라고 번역하고 있다. 원문[烏可以爲情無有不善]에 의하면 김영두의 “어찌 정은 늘 선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임헌규도 한국고전번역원처럼 “그 러니 어찌 감정에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이황, 기대승, 2014, p. 77)로 옮기고 있다.

10)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後論」, “且四端亦有不中 節之論, 雖甚新, 然亦非孟子本旨也。”

11)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後論」, “以亂於四端粹然 天理之發乎?”

12)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七』, 「答奇明彦」, “敢問喜、 怒、 哀、 樂之發而 中節者, 爲發於理耶? 爲發於氣耶? 而發而中節, 無往不善之善, 與四端之善, 同歟異歟? ”

13)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七』, 「重答奇明彦」, 「附奇明彦四端七情總論」, “然其所謂情者, 喜、 怒、 哀、 懼、 愛、 惡、 欲之情也, 與《中庸》所謂喜、 怒、 哀、 樂者同一情也。”

14)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七』, 「重答奇明彦」, 「附奇明彦四端七情總論」, “喜、 怒、 哀、 樂發皆中節者, 卽所謂理也、 善也”

15)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七』, 「重答奇明彦」, 「附奇明彦四端七情總論」, “七情雖兼理氣, 而理弱氣强, 管攝他不得, 而易流於惡, 故謂之氣之發也。然其發而中節者, 乃發於理而無 不善, 則與四端初不異也。”

16)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七』, 「答奇明彦」, “雖發於氣, 而理乘之爲主, 故其善同也。”

17)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右三圖, 上一圖, 林隱程氏作, 自有其說矣。其中、 下二圖, 臣妄竊推原聖賢立言垂敎之意而作。”

18)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其中圖者, 就氣稟中指出本然之性不雜乎氣稟而爲言”

19)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其言性旣如此, 故其發而爲情, 亦皆指其善者而言”

20)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性善之性、 程子所謂卽理之性、 張子所謂天地之性, 是也。”

21)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如子思所謂中節之情、 孟子所謂四端之情、 程子所謂‘何得以不善名之’之情、 朱子所謂‘從性中流出, 元無不 善’之情, 是也。”

22)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洞規後敍」

23)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其下圖者, 以理與氣合而言之”

24)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亦以理氣之相須或相害處言。”

25)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如四端之情, 理發而氣隨之, 自純善無惡, 必理發未遂而掩於氣, 然後流爲不善; 七者之情, 氣發而理乘 之, 亦無有不善, 若氣發不中而滅其理, 則放而爲惡也。夫如是”

26) 한국고전번역원은 이 부분을 『고봉전서(高峯全書)』,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상편』, 「퇴계가 사단ㆍ칠정을 논한 데 대해 고봉이 답한 편지」에서 “진실로 모두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로 번역하 고 있다. 원문[固不可皆謂之善也]의 ‘固’를 본문의 임헌규처럼 ‘본래는’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한국고전번 역원의 번역처럼 ‘진실로’로 해석하는 것이 더 기대승의 입장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김영두도 한국고 전번역원과 같이 이 부분을 “진실로 모두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이황, 기대승, 2006, p. 391)로 번역 하고 있다.

27)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答奇明彦」, 「後論」, “且四端亦有不中 節之論, 雖甚新, 然亦非孟子本旨也。”

28) 한국고전번역원, 『퇴계집(退溪集)』,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必理發未遂。 而掩於氣。然後流爲不善。”

29) 한국고전번역원, 『고봉전서(高峯全書)』,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하편』, 「퇴계가 사단ㆍ칠정을 재론한 것에 대해 고봉이 답한 편지」, “四端乃七情中發而中節者之苗脉”.

30) 한국고전번역원, 『퇴계집(退溪集)』,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其下圖者。以 理與氣合而言之…. 其言性旣如此。故其發而爲情。亦以理氣之相須或相害處言。如四端之情。理發而氣 隨之。自純善無惡。必理發未遂。而掩於氣。然後流爲不善。七者之情。氣發而理乘之。亦無有不善。若氣 發不中。而滅其理。則放而爲惡也。夫如是。”

31) 朱子, 『朱子語類』권53, 「孟子三」, 40면: “惻隱羞惡, 也有中節、 不中節。若不當惻隱而惻隱, 不當羞 惡而羞惡, 便是不中節。”

32) 영남퇴계학연구원ㆍ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 “주자어류 [朱子語類]”, “天命之性, 本末嘗偏。但氣質 所稟, 卻有偏處, 氣有昏明厚薄之不同。【65】然仁義禮智, 亦無闕一之理。但若惻隱多, 便流爲姑息柔 懦;若羞惡多, 便有差惡其所不當羞惡者。”

33) “‘사단무불선’이라는”의 오타로 보인다.

34) 한국유경편찬센터, 『退溪全書』, 『退溪先生文集卷之七』,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說」, “而凝道作聖之要, 端本出治之源, 悉具於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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